나 같은 와이프

이런 와이프라 좋지 않아?

by 쏘냐 정

어느 날 뜬금없이 남편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 찾아서 하는 와이프라 좋지 않아?"

3일 연속 남편에게 빠른 퇴근을 요구하고 저녁시간 음악회와 북콘서트에 다녀온 다음날이었다.

남편은 대번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계속해서 대답을 원하는 눈빛을 보내자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지는.............. 않지."


순간, '아, 내 설명이 짧았구나. 이 한 문장으로 내 의도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나를 이해해주는 남편이라 저 한마디로 내 의도를 간파하리라 착각했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는 처음부터 다른데. 아빠와 엄마 역시 입장 자체가 다른데. 그냥 남과 나는 생각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일 뿐인데.


그래서 한번 더 질문했다. 설명을 좀 더 보태어서.

"나는 이렇게 눈빛이 반짝이는 사람이고 싶어. 남편에게도 그런 아내가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오빤 내 눈에 빛이 사라지고 늘 우울해하면 힘들 것 같지 않아? 물론, 가정일에만 충실하면서 눈빛이 반짝일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걸? 나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러면 우울증에 걸릴지도 몰라. 난 더 좋은 아내, 엄마가 되고 싶어서 이렇게 열심히 내가 하고 싶은걸 찾아 나가는 거야."

남편은 또다시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마음속 깊이 이해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당당하게 말할 테니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일 시간을 내어준 것에는 분명하니까.

남편이 덧붙였다. 자기는 그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일찍 왔을 뿐이라고.

그런 생각을 해주는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당당히 요구하는 나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심지어 퇴사하고 나의 수입이 0이 되었던 그 순간에도 당당했다.

끊임없이 나의 것들을 찾아 헤맸고 남편에게 나의 시간을 요구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것이 내가 행복한 엄마 노릇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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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영화를 봤다. '82년생 김지영'

몇 년 전 소설이 나왔을 땐 애써 외면했던 작품이었다. 행복하고자 애를 쓰는 나의 엄마 인생에 굳이 우울을 끌어다 넣고 싶지 않았다. 우울하기 너무나 쉬운 날들에 우울할 이유를 굳이 구체적으로 이름 붙여 주렁주렁 달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가 나왔단다. 음, 캐스팅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그래도 망설였는데 리뷰들이 나쁘지 않다. 게다가 지금 나는 '엄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중이다. 보고 싶어 졌고 예매를 했다.

신경치료 후유증으로 퉁퉁 부은 턱을 머리카락으로 가리며 굳이 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보며 많이 울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덤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공감했다는 뜻은 아니다. 빠른 83이라 82년 생들과 같은 학번을 공유한다. 그래서 더더욱 동일시하게 되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나의 아빠는 아들이 귀한 집 장남이었고, 나는 딸만 둘인 집의 장녀였다. 정말 옛날 분이셨던 집안 어른이 작은집에 둘이나 있는 아들과 우리 집 딸 하나를 바꾸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어디선가 전해 들었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들은 그 이야기는 나에게 깊이 새겨졌다. 나는 아들보다 나은 딸이 되어야 했다.


나의 부모님은 딸들을 정말 사랑으로 키우셨다. 드러내 놓고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성적이 꽤 좋은 똑똑한 딸이 커서는 남자들과 차별 없이 경쟁하는 멋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렇게 자란 내가 대기업에 취업하고 일이 너무 많아 허덕일 때 아빠는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그래도 너희 회사는 남자와 여자를 대등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네가 힘든 거야. 대등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너에게 이렇게 버거운 일을 맡기지 않았을 거다." 아빠의 그 이야기가 힘들 때마다 버티는 힘이 되어주었다. 자기의 회사에는 여성에게는 승진의 유리벽이 존재한다며 퇴사를 결심했던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 회사에는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여성 선배들이 많았기에 나는 더욱 희망을 가지고 일을 했더랬다. 그런데 그 세상은 내가 아이를 낳으면서 끝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엄마들의 불행에는 사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책임전가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사실이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이렇게 대히트를 치는 거겠지. 여성들도 차별 없이 교육받은 세대. 우리는 여성이지만 남성과 다름없이 꿈을 꾸라는 메시지를 듣고 자랐다. 꿈을 꾸고 꿈을 좇아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결혼하고 출산을 하는 순간 그 메시지가 달라진다. 여성은 엄마가 된다. 어떤 이는 엄마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할 것을 요구받고, 어떤 이는 일은 해도 되지만 엄마의 역할에도 충실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처럼 꿈을 좇으면 책임감 없는 엄마로 전락하고 만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결국 그것은 꿈을 좇는 엄마들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없는 대한민국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의 근원적 변화를 가로막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꼬장꼬장한 인식. 그것 때문일 테지.


솔직히 나는 그 인식의 변화가 단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는 정말이지 지난한 일. 큰 책임은 사회에 있지만 우리 개인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이유다. 그래서 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다. 당당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엄마가 되기를. 내가 그렇게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시발점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가 나의 그런 생각을 너무나 비슷하게 담고 있어 깜짝 놀랐다.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구나 생각함과 동시에, 정말로 나는 평범한 사람이구나 생각한다.


덧,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중에라도 이 영화 꼭 챙겨보라고. 지난번에 나 같은 와이프가 좋지 않냐고 물었던 내 질문에 대한 답이 고스란히 들어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