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싶나요?
내가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 책을 쓰고나면 가장 먼저 정리하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계속 생각을 하면서도 쉽게 시작하지 못했던 건, 그 이유를 한두가지로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꽤나 멋있고 의미있는 이유부터 구차하고 찌질한 이유들까지.... 그 해는 내가 전업맘 7년차가 되는 해였고, 내가 누구보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두가지 이유로 쉽게 시작할 수는 없었다. 많은 이유가 쌓인 후에야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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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티를 타서 마시다가 문득 티인스트럭터 수업을 들으러 다녔던 때가 생각이 났다. 덕분에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도 하나 새삼스럽게 떠오른. 그래서 그 이유부터 먼저 적어볼까 한다. 사실 미리 목차를 고민했다면 한참 뒤에 했을 이야기. 너무나 개인적이고, 그저 내 욕심같고, 그래서 내놓기 쑥스러웠던 나의 민낯같은 이야기.
밀크티 한 잔에 이 이유가 소환된 이유는 타이틀의 부재로 겪었던 자존감 추락을 경험한 첫 경험이 티인스트럭터 수업 첫날이기 때문이다. 그 수업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수업이 퇴사 후 처음 갔던 곳이었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 수업 첫 시간의 자기소개가 삼성전자 마케터라는 타이틀을 떼고 하는 첫 자기소개였기 때문이다. 더이상 삼성전자에서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냥 엄마라고 말해야 하는 그 순간, 어떻게 자기소개를 이어나가야할지 머리가 멍해졌다.
누가 뭐라고 한건 아니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랬을 뿐. 그냥 엄마라고 말하고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처음이어서 그렇다고, 이제 곧 적응이 될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내가 당황스럽고 그런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마지막 수료를 위해 주제발표를 하던 날, 꽤 좋은 직장에 다니는 내 또래의 동기가 하는 발표에 다른이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역시 ㅇㅇ다니는 사람은 다르네." 그 말은 내가 불과 얼마 전까지 듣던 말.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 말이 된 그 말. 타이틀의 부재가 내 자존심에 흠집을 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과거의 타이틀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미 지나간 것을 놓아주지 못했다. 어디에선가 나를 소개할 때마다, 지금은 전업맘이지만 얼마전까지는 삼성전자에서 마케팅을 했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소개가 끝날 때마다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나는 지금의 나보다 과거의 나를 사랑한다고, 사실 난 지금의 내가 부끄럽다고 직접 고백한 것 같아서 그 자리의 사람들을 보기가 민망해졌다.
아마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겠지. 소개가 끝날 때마다 느꼈던 민망한 역시 그저 나만의 생각이었을거라는 걸 알고있다. 내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서 스스로 가둔 감옥. 그 안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둘째 돌 무렵, 세살에는 어린이집에 보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시점인 1년 후 함께 일해보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1년 후의 상황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그때는 무산될지도 모르지만 그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그리고 진짜로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던 그 해, 나는 망설이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날인데 그 순간 나는 나에게 묻고있었다.
"Why? 왜? 왜? 왜 일이 하고 싶은건데?"
이 질문들 앞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엄마의 삶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로 사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마케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설렜지만 충실한 엄마의 삶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막막함이 앞섰다.
나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 나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엄마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마케터로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케터라는 타이틀 그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의 삶은 너무나 행복했지만, 여전히 엄마라는 타이틀은 초라하게 여겨져서 다른 타이틀을 목말라했던거라는 깨달음. 그걸 깨닫는 순간, 다시 마케터가 되는 일을 시도함과 동시에 다시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엄마로 살며 고민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마케터로 사는 기회를 내려놨다. 하지만 이제 아쉽지 않았다. 그 때 만났던 참이미지연구소의 대표님이 나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망설여진다면 그냥 패스하세요. 정말 하고싶은 일이라면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든 할 방법을 찾았을거에요. 그렇지 않다면 진짜로 하고 싶은게 아닐수도 있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확신했다. 이건 내 마음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니구나. 엄마로 사는 내 삶이 행복하고 내가 엄마로 살고 있어 내 가족이 행복한데 왜 행복대신 타이틀을 더 욕심냈을까. 그렇게 마음에서 떠나보냈다.
그 이후 한 모임에서 엄마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던 날, 사람들이 행복한 엄마인 나를 존중해주는 귀한 경험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전업맘이라는 타이틀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전에도 나는 나를 전업맘이라 불렀다. 일을 그만두고 엄마의 자리에 섰지만 말그대로 전업엄마로 살기로 결정한 것이지 전업주부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어디서나 전업맘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하지만 그 소개뒤로 늘 작아지곤했었다.
그날 이후, 전업맘이라는 타이틀과 전업맘의 경력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업맘이 얼마나 대단한건데"라고 늘 해왔던 말. 그 뒤에 사실은 열등감이 묻어있었음을 깨달았고, 그걸 깨닫는 순간 열등감을 내려놓게 되었다.
최근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놀라워한다. 당신에게 전업맘이란 타이틀은 처음부터 그렇게 당당한 것이 아니었냐고 되묻는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참 부끄러워했었다. 그 타이틀을.
전업맘이라는 타이틀이 자랑스러워진 순간, 나는 거기에서 멈출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나에게 새로운 꿈이 생긴 것이다. 전업맘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기 힘들것 같다고 여겼던 그 생각을 뒤집어보고 싶어졌다.
그때 마음속에 품었던 꿈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책을 한 권 써보고 싶다는 꿈. 그리고 작가라는 타이틀이 가지고 싶어졌다. 타이틀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욕심내는 타이틀 앞에서는 진짜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사실 삼성전자 마케터라는 타이틀은 묘한거였다. 입사시험을 통과하여 입사했으니 시작은 내가 선택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나의 가치와 상관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타이틀이 되었다. 회사는 나를 성과로 평가했지만, 세상은 그냥 타이틀로 나를 평가했다.
이제 다시 바닥에서, 새로운 분야에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는다면 그건 또다시 내가 직접 만들어낸 의미있는 타이틀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도전 앞에서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나 작가라는 타이틀이 갖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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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많은 이유 중에서 이 이유만은 마지막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타이틀에 대한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분명히 그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것을.
지금 나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전업맘, 엄마라는 타이틀이 여전히 자랑스럽다.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과거를 들먹였고, 그 다음에는 강박적으로 과거를 눌렀지만, 이제는 자유롭게 나의 과거와 오늘을 이야기한다. 내가 과거에 삼성전자 마케터였다는 사실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든 나의 역사일 뿐이라고, 그것을 굳이 숨겨둘 이유도 없다고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꺼내오면서 이제 나는 과거와 지금의 나를 모두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음으로서 전업맘이라는 타이틀의 가치를 높이고 싶다. 어느 평범한 전업맘이 책을 써내 작가가 됐으니 모든 전업맘에게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세상이 봐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육아서를 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전업맘으로 산 지난 시간들 때문이니 전업맘 경력이 진짜 경력이 되는 경험인 것. 그래서 더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책은 그렇게 써내려간 육아서. 그 다음에는 평범한 엄마의 삶과 도전을 써내려간 에세이가 되기를 또 바래본다.
쓰다보니 꽤나 길어진 내가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 첫번째 이야기. 앞으로 두번째, 세번째 이야기도 이어나가보려 한다. 이 모든 이야기 속에서 내가 늘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의 모든 엄마를 응원합니다." 나를, 그리고 오늘도 엄마의 길을 가는 모든 이를, 늘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