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리고 나의 그 시절
TV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은지 한참이 됐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쁘던 어느 날 심한 몸살이 왔고 무심코 TV를 틀었다가 드라마 '산후조리원'을 만났다. 결국 처음부터 정주행 하게 된 이 드라마.
지난달 나의 책 "엄마 육아 공부"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조금씩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던 나의 과거가 이 드라마 주인공의 시간과 너무 맞닿아있었다. 어쩌면 우리 모든 엄마들의 시간과 맞닿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6회의 마지막 즈음에서 그런 독백이 나온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 순간, 그 주인공에게 나의 책을 보내주고 싶어 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덕분에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 그때의 나에게 이런 책이 정말 필요했다는 걸 알아서. 그래서 나는 결국 이 책을 썼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 엄마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이 시간을 지나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거기에서 시작된 거였다. 힘들었던 그 시절의 나. 그 시절의 나에게 누군가가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면 좋았갰다는 생각. 거기에서 시작된 나의 책.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책날개의 내 소개에 이렇게 나온다. "엄마로 사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퇴사를 했지만 초보 엄마가 엄마로만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했고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인 나를 행복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책을 쓰게 된 이유였다.
이 드라마 속의 현진은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이다. 회사 내에서 인정받는 여성 임원. 하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 모든 것은 변했다. 내가 퇴사원을 낸 것은 입사하고 9년째 되는 해였다. 그러니 이 드라마의 주인공만큼 오래 일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높이 올라가지도 못했다. 현진의 나이는 42살, 내가 첫째를 낳은 나이는 31살. 그만큼 직장생활도 덜 했다. 만약 내가 십 년 더 직장생활을 했다면, 그래서 더 많은 걸 이루었다면 퇴직원을 내기 더 힘들었을까. 자꾸 그때의 나로 돌아가게 된다.
드라마 속 현진을 볼 때마다 예전 내 직장생활이 끝맺던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시기적으로 비틀어진 딱 그 시점. 언젠가 글에 그렇게 쓴 적이 있다. 아이를 계획은 했었지만 계획보다 빠른 임신에 모든 것이 비틀어졌다고. 거기에 미처 쓰지 못했지만, 사실 그 비틀어진 문제는 바로 과장 진급이었다.
과장 진급을 앞둔 해에 나는 첫째를 임신했다. 아이를 낳더라도 과장 진급은 하고 낳고 싶은 마음에 몇 달 후로 임신을 계획했었다. 그런데, 딱 몇 달 먼저 들어선 아이 덕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뭐, 과장은 아니었어도 남부럽지 않은 업무량으로 경험은 충분했다. "우리 부서 차장급 사원"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부서 대표 관계부서 회의 참석을 도맡아 했다. 과장님의 SOS에 지원군이 될 수 있는 사원이었다. 대리 주제에 차장님, 과장님을 팀원으로 하는 TF 리더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거 말고 진짜 간부가 되고 싶었다. 노사로 굳이 나눈다면 이제 노조에도 못 들어간다는 그 간부.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그 해 진급 욕심을 버렸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기회가 왔다. 당시 내가 맡고 있던 업무가 확장되면서 진행된 TF 활동. 거기에 이어진 새로운 부서의 세팅. 처음에는 거절했다.
당시 나는 입덧이 심한 임산부. 그 부서로 옮겨가면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 부서에는 관련 업무 경험자가 나 하나뿐인 상황. 제대로 세팅될 때까지 나에게 업무가 과중하게 집중될 것이 너무 뻔한 상황이었다. 여러 번의 거절.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결국 마지막에 인사담당 임원분이 말씀하셨다. 대신 과장 진급을 약속하겠다고.
그 말 앞에서 나는 거절의 말을 거둬들였다. OK. 그리고 바로 새 부서로 출근을 시작했다. 임신 시점 때문에 포기했던 마음 다시 끌어올려 마지막까지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출산을 하고 진급을 결정하는 고과가 오픈되던 날. 내게 돌아온 것은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미안하네. 정대리까지는 챙길 수가 없었네." 하아. 그 날 현실을 깨달았다. 누구 탓을 해야 할까. 그저 임신을 하고 휴직을 한 내 탓이었다. 내가 비운 이후에도 부서는 바쁘게 돌아갔을 테고 다들 열심히 일을 했을 테지. 그리고 그 모습들 속에서 그 부서를 세팅하기까지 고군분투한 나의 모습은 흐려져버린 것이 당연했다.
그 날, 엄마가 된 나와 회사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과장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면 그저 다시 돌아가서 열심히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결국 그 사건은 내가 퇴사를 결정하는 게 큰 계기가 되었다. 이제 복직한다고 해도 예전의 나와 같은 나일수는 없다는 현실에 대한 자각. 어쩌면 나는 그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친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 워킹맘들을 보면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요즘 나는 엄마로 사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거기에 늘 덧붙인다. 그렇다고 해서 아쉽지 않은 게 아니라고 말이다. 이 드라마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 "불행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행복해졌다." 나도 그랬다. 나의 아쉬움과 슬픔을 인정하는 순간, 엄마라는 다른 세상의 행복을 오롯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 아쉬움을 맘껏 슬퍼하고 지금의 행복을 맘껏 누린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
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슬픈 순간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화가 나는 순간이 없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엄마라고 해서 아이에게 화 한번 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훈육 법칙들이 "안 돼"를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안 돼"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뜻도 아니다. 단지, 꼭 "안 돼"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을 위해 아껴두라는 것뿐.
2013년 9월 나의 첫 아이가 태어났다. 그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예상하지 못하던 세상에 갑자기 들어와 참 많이도 헤맸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무력감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끝없이 땅을 파고 들어가고, 끝없이 작아지곤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는 치열했던 8년을 지나, 지금 행복을 말하게 되었다. 후배 엄마들은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듬뿍 담아 육아서도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그것이 다른 이들을 위한 마음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건, 8년 전의 나에게 내가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 그때의 나에게 건네고 싶었던 이야기. 그것이 나의 책이 된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책을 쓰겠다며 자리에 앉았던 나를 또 한 번 토닥토닥해본다. 과거를 날아다니던 기억들 속에서 울면서 썼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한번 더 바라본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고, 그리고 매 순간 행복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게 되기를.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그것을 인정함으로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