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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Feb 28. 2022

내가 잘 살고 있구나 느끼는 순간

이 행복이 오래가기를....

행복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회사에서도 행복하자며 건배 제의를 했다가 야유를 받곤 했다. 모두가 참으로 열심히 일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공간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틈은 없는 것 같았다. 왜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가 아닌가. 그게 이상하다 여겼던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행복을 말하기엔 너무 팍팍한 세상. 결과물을 내기 위해 달리는 동안 중요한 건 스피드였다. 행복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인가 자문하는 순간 느려질 것이 뻔할 터. 애써 행복을 미뤄두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 세상의 기준을 맞출 수 있었다.


나 역시 차가운 로봇이 되어갔다. 일을 시작한 이후 행복이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과와 인정, 성장과 보람. 그것과 맞바꾼 것은 나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삶을 통틀어 가장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순간이면서 유일하게 행복을 자신하지 못했던 시간들이기도 했다.


어쩌면 사족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건, 행복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순간이 저 때이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하다 느낄 때마다 그때가 생각난다. '행복하자'라고 건배 제의를 하고서는 야유를 받았던 햇병아리 정 소령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진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요즘. 나는 자주 행복을 느끼고는 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 잘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10살, 6살. 나의 아이들에게서 어린 시절 내 얼굴에 번지던 행복의 미소가 보일 때다. 향수 어린 그 시절은 말랑말랑한 향을 가지고 있다. 포근하면서 따뜻한데 지나치지 않고 은은한 향이다.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아빠 목마를 타고 가던 길. 제과점 갈 때마다 먹고 싶었던 별사탕을 겨우겨우 얻어냈을 때의 그 환희. 엄마가 만들어주던 오징어 조림. 퇴근이 늦은 아빠의 시간을 맞추느라 9시 뉴스와 함께 하곤 했던 우리 가족의 저녁 시간. 동생과 뛰놀던 파릇파릇한 공원. 아빠, 엄마, 나, 동생. 넷이 손잡고 걷던 산책길.


그런 소소한 행복에 감싸여서 내가 꿈꿨던 것은 더 큰 행복이었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면 특별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었으면 했었다. 그러면 그때는 몇 배는 더 큰 행복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때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지났고 지금의 나는 여전히 어릴 적의 나처럼 평범한 날들을 영위하고 있다. 대단한 행복을 얻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평범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행운임을 아는 어른이 됐다.


어릴 적, 그때와 같은 행복이 내 가정에 번져갈 때 나는 더없이 충만해진다. 과자 하나 들고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면서, 네 살 차이 나는 형제가 손 잡고 앞서가는 모습을 보면서, 둘이 투닥거리다가 에엥 울어버리는 아이의 귀여운 표정을 보면서, 같은 포즈로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넓은 놀이터에 나가서 팡팡 뛰어다니며 신나 하는 아이를 보면서, 딱풀처럼 엄마에게 딱 붙어서는 헤헤거리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이야, 정말 행복한 인생이야.'


그리고 기도하게 된다. 이 행복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우리 아이들 역시 대단한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이러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길. 소소한 행복 역시 중요한 것임을 아는 어른이 되길. 그래서 매일매일 그날의 행복을 놓치지 않고 흠뻑 누리는 사람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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