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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사 May 13. 2023

3. 학벌, 나이, 공황장애가 삶을 가로막을지라도

생의 계단을 밟아 나갈 수만 있다면

조카가 대신 전하는 삼촌의 에세이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에는 집안 여건상 학교에 가기보다 일찍이 경제활동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형제가 많으면 아들을 우선적으로 학교에 보내어 그 아들이 커서 집안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기도 하고, 먼저 서울에서 일을 시작한 큰 형제들이 동생들의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보다는 사회 전선에 뛰어든 아이들은 커갈수록 짧은 학벌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삼촌도 그중 한 명이었다.



재작년부터 경력 단절의 시기가 찾아왔다. 원래는 그림 말고도 스스로 그래픽 기술을 독학해 디자이너로 프리랜서 생활을 해왔지만, 몸이 안 좋아지면서 2 년 간의 공백기가 생겼다. 고된 직장 생활의 여파로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공황장애는 알 수 없는 때에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찾아와 삼촌의 숨을 조여왔다. 밖에 나가서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어지럽고 구토가 나온다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에도 시달려야 했다. 이명에 잠 못 드는 날도 많았고, 뭔가를 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일들이 반복됐다.



올해부터 다시 상태를 회복하면서 취준에 뛰어들었지만, 나이 때문인지 전문직에 종사할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취준이 더디게 진행될수록 삼촌의 상태는 다시금 나빠졌다. 전화기 너머 삼촌의 목소리는 몹시 낮았고 힘이 없었다.


무얼 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늘 누워있다고 대답했다. 주로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외출이라면 산책이나 마트를 나가는 것뿐이니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무뎌지고 있는 듯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서예도 단련해야 한다며 3개월째 당나라 시를 꾸준히 필사해 오던 사람이었다. 언젠가 삼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죽지 못해 사니까 그림이라도 그리는 거지.' 그림도 글씨 연습도 하지 않는 지금의 삼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도 취준을 하며 방황과 실패의 사이에 놓여 하루 종일 누워 있던 날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 같다고 생각했다. 결코 편할 수 없는 취춘위 시간은 긴장 상태로 쳇바퀴 굴러가듯 흘러갔다. 그나마 위안이 되던 것은 삼촌의 집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결심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방문하게 되었다. 집에 온통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들 뿐이라 다녀올 때마다 시각적인 명상을 하고 온 기분이었다. 어쩌면 삼촌이 기대고 있는 것은 이 안온한 집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서재에는 시집이나 정신에 관련한 책들이 많았다. 삼촌이 가진 그림에 대한 가치관은 이러했다. ’그림 자체가 시의 표현을 담는 그릇이고, 자기 정신을 시의 표현으로 끄집어내 그림으로 연장시키는 것.’ 그에겐 동양화란 자기의 완성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완성으로 가는 길엔 반드시 시가 있었다.


삼촌에게 나와 같은 지금의 청년에게 어떤 시를 추천해주고 싶은지 물었다. 헤르만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계단'이라고 답했다. 모든 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움을 향해 명랑하게 나아가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시가 담긴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다.



꽃이 모두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꺾이듯이
인생의 각 계단도 지혜도 덕도 모두
그때그때 꽃을 피울 뿐
영속되지 않네






*별첨

https://youtu.be/bQfEujf2J5Q

삼촌의 시 낭독을 시작으로, 집 안 풍경과 함께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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