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임브라(Coimbra)
Coimbra climbs Coimbra falls, 주제 사라마구는 그의 책 Journey to Portugal에서 코임브라 여행기의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 이곳은 포르투갈 중부의 중심 도시, 코임브라이다.
가파른 거리를 오른다. 비좁은 골목길들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간다. 골목길은 마치 시공간처럼 휘어있다.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 골목길은 마치 흐릿한 미래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잠시 촛농처럼 서서 주저한다. 골목길 어귀에는 작고 아담한 계단들이 나타난다. 포르투갈 특유의 색깔 대문들은 흑백영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컬러화면 같다. 대문들은 벽을 따라 촘촘히 골목의 끝을 향한다. 어느 건물의 외벽 철제 계단을 따라 또각또각 발소리가 내려 온다. 오래된 유산의 고풍스러운 냄새가 풍기는 이곳에서도 누군가 산다는 사실이 낯설어 물끄러미 지켜본다. 그사이 다른 집에서는 이어폰을 낀 젊은 여인이 작고 낡은 철문을 열고 나와 분리수거를 하고 표표히 길을 나선다.
비탈길과 골목길, 인간의 삶이 그 언저리에 있다. 남산 해방촌에서 잠시 기거하던 때의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당시 느꼈던 삶과 청춘의 비릿한 냄새가 지구 반대편의 이곳에서 돌연히 되살아난다. 그러니까 이 도시의 골목 어귀에서는 유구한 유산보다 신산한 현재가 만들어내는 삶의 익숙한 정취가 있다.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코임브라는 멀리서 보면 붉은 지붕 건물들을 불규칙하게 쌓아 올린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꼭대기에는 가장 유명한 코임브라대학교가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이곳은 크게 알따(Alta, 고지대)와 바이샤(Baixa, 저지대)로 나뉘는데 본격적인 도시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17세기에는 주로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학생들이 알따에 거주하였으며 바이샤는 몬데구 강을 따라 상업지가 형성되어 주로 상공인들이 거주한 곳이었다. 말하자면 직업에 따라 혹은 계층에 따라 주거지가 나뉘어 있었던 셈이다.
중세인이 된 것처럼 코임브라의 바이샤를 걷는다.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선 바이샤의 번화가, 페헤이라 거리를 구경한다. 그리고 곁가지의 길로 꺾어 들어간다. 벽면에 붙은 길 이름, Rua de Quebra Costa은 일종의 경고문처럼 보인다. 실은 이곳은 대표적인 코임브라의 관광 루트다. 이른바, 알메디나 아치를 통과하는 것으로 코임브라 순례가 본격 시작된다. 알메디나 아치는 페헤이라 거리와 쿠스타 거리를 잇는 통로, 그러니까 고지대로 틈입하는 구멍과 같다. 아치는 그 설립 기원이 오래전 이슬람 무어인의 점령 시절인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이 아치가 성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고 한다. 아치 밑에는 공교롭게도 붉은 옷을 입은 거리의 악사가 조그만 파두 기타를 치고 앉아 있다. 마치 중세에도 그랬을 것 같은 풍경인데, 그의 얼굴은 얼핏 수도승의 그것과 닮았다. 이제 아치를 통과하면 가파른 계단길을 마주한다.
Quebra Costa 길에서는 누구든지 어느 소녀를 만날 수 있다. 소녀는 자신의 이름이 뜨리까나(Tricana)라고 말한다. 뜨리까나는 실은, 그저 시골소녀라는 의미다. 그녀는 그러니까, 억척스러운 코임브라 시골 소녀다. 검정 치마를 입고, 작은 행주치마를 두르고, 목에는 스카프를 둘렀으며, 어깨에는 숄을 매었다. 그리고 항아리를 머리에 얹고 몬데구 강에 물을 길으러 간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예술가들이 사랑한 여자였다. 그녀는 그들의 작품 속에서 새로 태어났고, 바로 이 거리에서 동상으로 영원히 살며 생의 한숨을 몰아쉬고 있다. 물 항아리를 팔에 끼고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쉬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인사를 건넨다. 유난히 강한 봄빛이 닳고 닳은 동상을 반질이고 있다.
길은 다시 양 갈래로 나뉜다. 왼쪽의 골목길은 멀리 강 건너까지 훤히 굽어볼 수 있는 탑(Torre de Anto)으로 향하고 있다. 오래전 그 타워에 서서 불청객들이 몰려오지 않는지 감시하던 사람들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바람 소리만 들리는 고즈넉한 전경만 남았다. 오른쪽 비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이 도시의 성스러운 상징인, 구 성당(Se Velha)이 파노라믹 뷰처럼 나타난다. 그동안 좁은 시야에 갇혔던 탓인지, 마치 사막 위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다. 성당을 중심으로 다양하고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이곳은 12세기 포르투갈의 초대 왕이었던 아폰수 1세가 스스로 왕임을 선포하고 수도를 코임브라로 옮기면서 건축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건축양식을 따라 로마네스크풍을 그 뿌리로 두고 있는데, 높은 벽 그리고 창문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성당이라기보다 조그만 성으로 보인다.
성당 앞 광장에서 우물쭈물하다가 어느 골목길 초입 벽면 아줄레주에 그려진 얼굴 하나를 발견한다. 희푸르한 몇 장의 아줄레주에는 주제 아폰수(Jose Afonso)라는 사내의 얼굴과 음유시인이었던 그가 살았던 집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그는 포르투갈 독재정권 시절 압제에 저항하고 자유를 노래하던 음악가였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사회운동가였다. 그가 바로 이 조그만 집에 살았다고 한다. 아줄레주 옆으로는 조그만 창이 열려 있고, 다른 벽면으로는 마치 액세서리같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서랍 만한 크기의 미니 테라스에 앉아 있다. 내 인기척 때문에 고양이가 신경질적으로 울었고 그 소리에 창 안에서 젊은 남자가 고개를 잠깐 내밀어 고양이와 나를 슬쩍 보고는 다시 창 안으로 들어간다. 엉겁결에 마주친 그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멀뚱히 서 있다가 그만 머쓱한 마음이 든다.
다시 길은 마침내 왕궁(Paço das Escolas)으로 이어진다. 성당의 왼편을 따라 다시 비탈을 오르면 이제 코임브라 대학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왕궁에 도착할 수 있다. 코임브라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유산의 정수가 모여 있는 장소다. 10세기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통치 시절 건립된 이곳은 이후 아폰수 1세가 실제로 거주한 포르투갈 최초의 궁전이기도 했다. 그 후 16세기에 들어서 대학 건물들이 설치되며 교육기관으로 변모하였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실 코임브라대학교는 디니스 왕에 의해 13세기 리스본에 설치되었던 것이 16세기 주앙3세에 의해 코임브라로 이전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성균관이 600년 남짓인 것을 생각하면, 코임브라대학교는 그보다 100년 정도 더 오래된 대학이다.
왕궁은 삼면이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광장이다. 왕궁의 남쪽으로 시야가 탁 트여있는데 발아래 몬데구 강(Rio Mondego)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주앙 3세의 동상이 한가운데 서 있는 왕궁에는 영국의 어느 신문이 세계에서 가장 멋진 도서관이라고 소개한 주아니나 도서관(Biblioteca Joanina)도 있다. 도서관의 역사와 건축학적 특징을 제쳐두고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놀랍게도 이 도서관에 박쥐가 산다는 점이다. 해충으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충을 잡아먹는 박쥐가 도서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인데, 박쥐를 일부러 들인 것인지, 원래부터 살고 있던 박쥐에게 늦게나마 영주권을 내어준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박쥐의 거주가 19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고 박쥐는 그래서 기분 나쁜 이방인이 아닌, 도서관의 터줏대감이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 도시를 굽어본다. 미로같은 골목길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분주히 오고 간다. 삶이란 어디든 대체로 비슷하게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뒤돌아보니 이 도시 어느 곳에서나 찾을 수 있는 대학 탑위로 포르투갈 깃발이 물결치고 있다. 이곳은 포르투갈의 도시, 코임브라이고, 나는 다시 가파른 거리를 터덜터덜 내려간다. 주제 사라마구가 비유하듯, 마치 삶의 능선 하나를 건너는 사람처럼 말이다.
Coimb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