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레(Nazaré)
이베스 베하르라는 스위스 출신의 유명 제품디자이너가 있다. 그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수많은 유명작이 있지만 언뜻 떠오르는 그의 작품 중에는 푸른색의 페이팔 로고가 있다. 그리고 그 푸른색 로고를 들여다보면 어쩐지 밀어닥치는 파도가 연상되는데, 나는 우연히 어떤 인터뷰를 보고서야 그가 열정적인 서퍼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느낀 파도와 그가 서퍼라는 사실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책상 앞에서 그림을 그리며 골몰하는 디자이너와 파도를 타는 서퍼사이의 간극은 일견 멀어보이지만, 실은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도 금세 깨닫게 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파도를 타는 행위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파도를 탄다는 것은 갑자기 속도를 얻어 미끄러지고, 파도 위를 나는 듯이 걷는 것이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그건 정말 자연현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죠.
서핑에 빠진 한 남자를 기억한다. 언젠가 본 다큐멘터리에서는 서핑에 빠진 한 남자가 동해의 어느 해안마을에 홀로 기거하며 서핑만을 삶의 낙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었다. 오로지 파도와 서핑뿐이었다. 몰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뭔가에 홀린듯 서핑보드를 끌어안고 달려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그는 속세를 떠난 수도승과 같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그는 동해바다에서 서핑보드를 타고 있을까. 바다에 파도가 치는 한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 시험지의 낡은 지문도 떠오른다. 그 글에서는 폭포가 자연에 순응하는 동양 철학을 의미한다면, 분수는 자연의 법칙에 역행하는 서양의 인위적 정신을 의미한다고 했다. 폭포는 자연 그대로이고, 분수는 일부러 만든 것이니, 당시 나는 그 글을 읽고 조금 피식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 영화 '인터스텔라' 속 밀러 행성의 거대한 파도를 목도하고서야 그것이 역시 거짓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파도는 먼 하늘 위 구름까지 닿으려는 듯 말아올라가며 스크린 밖으로 천천히 몰려오고 있었다. 자연과 우주는 인간 지각의 영역 외에 있었다. 그리고 밀러 행성의 터무니없는 파도와 비슷한 것이 사실 지구 행성에도 존재한다면 그 사실은 보다 명확해진다. 나는 지금 포르투갈 북서쪽 마을, 전 세계 서퍼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나자레에서 파도를 보고 있다.
30미터가 넘는 나자레의 빅웨이브를 단 한차례의 방문에 목격하는 행운은 매우 드물다. 나자레 주민의 말이다. 하지만 벌써 세번째 방문이라는 나의 하소연에 대해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아내는 며칠전부터 빅웨이브 알람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다시 헛수고였다. 나자레의 거대 파도는 겨울이 시즌이었지만, 실제로 공포를 느낄만큼의 거대한 파도는 시즌 중에도 만나기 힘들었다.
일찍이 동영상에서 본 나자레의 파도는 밀러 행성의 파도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높이의 파도였다.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서도 충격적이라는 말이 많았다. 나도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에 터무니없는 높이의 파도가 친다는 사실과 그 높이의 파도를 타기 위해 전세계에서 온 목숨을 거는 서퍼들의 이야기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비록 세번째 방문에도 빅웨이브를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빅웨이브와 무관하게 나자레에서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존경이 한데 뒤섞이는 이상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서핑은 사실 이베스 베하르가 표현했듯, 스포츠라기보다 종교에 가깝기 때문이다.
Nazar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