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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옐로 Aug 08. 2022

중세의 어떤 하루

오비두스(Óbidos)

 중세라는 말에는 어쩐지 마술적 낭만이 있다.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시대, 영주와 기사 그리고 농노의 기묘한 신분제가 만들어진 시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도시마다 성을 쌓던 시대였고, 흑사병이 휩쓸던 시대이기도 했다. 엄혹한 그 시대의 공기에는 분명 피바람이 섞여 있었을텐데, 오랜시간이 지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마을을 가면 슬몃 웃음부터 나온다. 아기자기한 건물과 그보다 더 따뜻한 골목길과 훈풍이 부는 성벽의 길을 걷노라면 중세가 인류사에서 가장 낭만적인 시대가 아니었나하는 착각마저 든다. 나는 그래서 이것을 남몰래 홀로 마술적 낭만주의라고 부르기로 한다. 나는 지금 리스본 북쪽의 중세도시, 오비두스(Óbidos)의 성벽길을 따라 걷고 있다.


성벽이 마을을 감싸안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여느 도시들이 그러하듯 오비두스도 5세기 로마인에서 시작해 8세기 무어인 그리고 포르투갈인들로 엎치락 뒤치락 주인이 바뀌었던 곳이다. 무어인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한 성벽은 마지막 주인에 의해 더 견고해졌다. 마을의 꼭대기에는 13세기에 지어진 성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고, 성벽이 아름드리 팔을 길게 뻗어 마을을 감싸안는 모습은 무척이나 따뜻한 느낌을 자아낸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집들은 작은 생명체들처럼 한없이 귀엽고 평화로워 보인다. 망루 위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던 병사는 사라졌고, 나와 같은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걷고 있다. 마을의 곳곳에서도 관광객의 머리 행렬이 보인다. 작고 아담한 중세마을 오비두스는 이방인들로 잔뜩 흥이 나 있다. 멀리 마을 초입 버스킹 악사의 음악도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흡사, 중세의 어느 축제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든다. 실제로 오비두스는 이런저런 축제의 마을이기도 하다.


골목길에 봄이 피었다


 골목길에는 식당과 서점, 카페와 바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체리주를 파는 가게 앞에 서서 초콜렛으로 만든 조그만 잔에 체리주 한잔을 담아, 술을 마시고 초콜릿을 씹어 먹는다. 오비두스의 시그니처같은 음식이다. 관광객들이 선 자리에서 다들 한잔씩 맛을 보는데, 나도 그들을 따라 맛을 보고 있다. 어느 서점에서는 어느 영국인 여성이 주제 사라마구의 책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 서점주인은 유창한 영어로 '포르투갈 여행'이라는 책을 소개해준다. 포르투갈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책을 만난 것이 무척 반갑다. 여자는 책을 몇번 보더니 사지는 않는다. 나는 그녀가 보던 책을 집어들어 괜히 몇번 넘겨본다. 서점 옆에 붙은 과일가게에서는 종이로 만든 조그만 콘에 블랙베리를 넣어 팔고 있다. 나는 딸아이에게 그것을 사준다. 아이는 골목길에 아무렇게나 앉아 정신없이 먹는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아이에게 너그러운 웃음을 보여준다. 



 마을 초입에는 버스킹 악사의 기타연주가 이어지고 있다. 악사는 관광을 시작하지도 않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한참이나 잡아두고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가면 이제 막 오비두스에 도착한 그만큼의 사람들이 다시 빈자리를 채우는 데 악사의 연주가 수준급인 것도 한몫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앞에 놓인 기타 케이스에 동전을 두고 간다. 그 모습을 보고 딸아이가 1유로를 달라고 보챈다. 아이는 음악보다 그저 1유로를 케이스에 넣고 싶다. 동전을 넣는 아이에게 악사가 고맙다는 의미로 윙크를 해준다. 아이는 무엇이 부끄러웠는지 깔깔거리며 엄마 품으로 달려간다. 그 모습을 다른 관광객들이 즐거워한다. 마을을 걸어나오며 중세를 마술적 낭만주의라고 부르기로 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어쩌면 피비린내나는 부박한 현실을 잊게하는 마술같은 낭만이 중세시대에도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시대가 달라도 인간의 하루는 그 결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중세의 어떤 하루가 그렇게 가고 있다.



Óbi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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