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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태경 Mar 20. 2022

새벽에 감행한 거사

시간은 막 새벽 4시를 넘겼다.

욕실 거울을 주시하고 있는 사뭇 비장한 표정을 한 그녀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져 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다.(관심 있는 상대가 아닌 바에야 타인의 세세한 면까지 신경 쓰겠는가)

내가 싫다.

암만 생각해도 맘에 안 든다. 그렇게 거울 속 내키지 않는 밉상과의 대치도 잠시.

뭉뚱그려 싹둑~

돌이킬 수가 없다.


며칠 전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거울이나 유리에 반영될 때마다 맘에 들지 않는 부분만 보이고, 내내 거슬린다.

숱이 성성해진 앞머리는 내 최대의 아킬레스건이다.


너덧 달 된 아기가 들어 있음 직한 불룩한 배도 까짓 탄탄이 속옷을 입고 겉옷으로 어찌어찌 가릴 수 있으니 패스.

애 둘 키웠으니 가슴이라는 표현보다는 그냥 탄력을 잃은 신체 부위가 되었으나, 쳐진 부위 올려주고, 삐져나온 옆구리 살 잡아주는 실용성과 기능성이 강조된 브라 덕분에 겉으로는 제법 빵빵해 보이니 이도 패스.

부모님이 주신 튼실한 허벅지에, 접영을 좋아라 했으니 쩍 벌어진 어깨는 장군감이다. 맘에 들지는 않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으니 이도 눈감아 줄 수 있다.

다만, 다만, 내 머리 돌리도~~~~~

언제부터인가 힘없이 빠져 나뒹구는 길쭉한(머리카락이 긴 탓에 더 눈에 뜨인다) 뽀글이 머리카락들.

다시 붙일 수만 있다면 월매나 좋겠냐고ㅜㅜ.

여태껏 살면서 얼굴과 몸을 관리하는 화장품은,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써도, 딱히 피부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집안 내력이라 내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튼실한 몸매는 심히 불만이지만, 감사하게도 타고난 피부 덕분에 화장품 값은 의도치 않게 절약된다) 관리를 하지 않는 원인을 굳이 찾자면, 발랐을 때 끈덕거리는 느낌도 싫고, 귀찮은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러다 보니 피부관리에 따른 지출 비용도 아까웠다.


외출 준비는, 샤워하고 바를 수 있는 모든 부위는 바디로션 하나로 OK, 얼굴은 파운데이션으로 나름 뽀얗게 피부만 정리하면 끝.

문제는 머리카락이다.

탈모에 좋은 영양제(검은콩, 검은깨 같은 식품은 매일 먹어줘야 하니 쉽지가 않다)를 알아보고, 두피 에센스를 뿌려

‘빠지지 마라~ 부디 자라기만 해 다오~~~’

기도하는 맘으로 마사지를 한다. 리뷰 좋고, 판매량 많은 탈모샴푸도 사서 사용법을 준수하며 신경 써서 샴푸를 한다. 그리 공을 들이건만 배수구에

‘네가 암만 그렇게 용을 써봐라~’

약 올리듯 까맣게 엉켜있는 머리카락 뭉탱이.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깨진 이도 다시 붙일 수 있고, 잘린 손가락도 붙일 수 있다는데.

왜!! 왜!!! 머리카락은 다시 못 붙이는 것이야. 피부만 좋으면 뭐하냐고요.


외출 시, 내 모든 신경 더듬이는 앞머리 숱에 가 있다.

톡톡 두드려 눈 가리고 아웅~, 흑채도 뿌려봤다. 날리는 시커먼 가루는 감당이 안되고, 외출해서 무심코 쓸어 넘긴다고 머리카락을 만질라치면 손이며, 이마며 시커먼스. 비나 물기가 닿으면 까맣게 흘러내리는데, 내 맘도 타들어 간다. 눈썹 칠하듯 바르는 것도 있으나 조그맣게 땜빵 난 것도 아니니 넓은 면적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겨울이면 비니를 써서 가린다. 매일 머리를 감지 않아도 되니 하루 이틀 거르고 모자를 쓰기만 하면 되니 따숩기까지 일석삼조다. 그래서 겨울엔 세상 편하다.

봄가을은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벙거지모자로 나름 버틸만하다. 문제는 더워서 모자쓰기 곤혹스러운 여름과, 모자와 코디할 수 없는 옷을 입을 때의 외출 준비 시간이다.

옷 갖춰 입기와, 화장은 초특급으로 가능하다.

최대의 복병은 머리손질(자격증이 있는 것은 아니나, 머리를 갂는 손재주가 있으니 머리손질 또한 수월하다)도 아니고, 재주 없는 이가 성글게 만들어 놓은 바구니처럼 속이 훤희 들여다 보이는 앞머리 숱.


벌써 봄이다. 낮엔 날씨가 제법 더워졌다.

그간 모자 속에 은둔하고 있던 앞머리는 축 늘어져 이래저래 매만져도, 근사하게 일렁거리는 여신 스타일은 포기다. 길어지니 축 늘어져 빈곤함을 여실히 보여주며 불모지가 드러난다.


그랬다.

야심한 시간 가위를 들고 거사를 감행한 이유다.

인정사정없이 잘려 나간 앞머리.



나름 스타일을 생각해서 길이를 재고, 조준을 잘해서 분명 눈썹 밑으로 잘 잘랐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 머리일 뿐, 가위를 든 손은 의지를 벗어났다.

ㅜㅜ영구가 따로 없다.

정리한다고 손을 델 수록 첩첩산중, 무너져 내리는 맘을 조롱하듯 널찍한 이마만 드러났다.

새벽에 이 무슨 짓인지…


시간이 약이겠지요.(몸 속 깊숙히 숨어 있던 초긍정에너지를 끌어올려 맘을 달랜다. ㅋ거울 속의 영구는 웃겨 죽는단다)

시간만이 해결해 줄 일이다. 잘려 나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머리카락이 야속하기만 하다.


밥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프다. AC~


쌀뜬물 넣어 깔쭉하게 끊인 뚝배기 된장찌개 한 숟가락에 입천장 데이고 나니 정신이 빠짝 든다. ㅋ조심성이 없다. 매번 뜨거운 줄 알면서도 덥썩 퍼먹는다.


배가 만삭이 되던 말던, 꽈리고추 썰어 계란으로 붙여낸 고추전에, 두부 잔뜩 넣어 뚝배기에 빠글빠글 끓인 칼칼한 된장찌개를 배부르게 먹고 나면 위로가 되어 주겠지.

이제 막 봄인데 땀띠야 나겠어? 영구 스타일을 벗어날 때까지는 쓰던 벙거지를 쓰면 되지.

ㅜㅜ한동안 거울은 못 보겠다.(야한 생각을 많이 하면 머리가 빨리 길어진다는데, 응큼~ 응큼~~ 시시때때로 야한 생각을 해야겠다. 뇌가 빨개진다ㅎ)


역시 먹는 보상만큼 불안하고, 성난 심리를 안정시키는데 빠른 게 없다.

배부르니 세상 행복해진다.

ㅎ단순무식.


삶은 의도치 않은 일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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