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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태경 May 08. 2023

나의 찬란한 봄

이팝나무 꽃잎 속에 숨어 있던 요정들이 하얀 비행을 한다. 살랑바람을 타고 소리 없이 사뿐히 땅으로 내려앉는다. 온 세상은 달뜬 볼을 한 소녀처럼 발그레하게 꽃축제를 한다. 가지가지 색들이 생기를 뿜어내며 뽐내기에 여념이 없다.

이 즈음이 되면 의례적으로 질리지도 않게 맴도는 추억.  

언 땅이 녹으며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봄만 되면 나물 캐러 소쿠리를 들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약수터 가는 길에 늘어 선 논두렁, 밭두렁, 포도밭을 오리가 되어 뒤뚱뒤뚱 앉은 걸음으로 지천을 헤집고 다녔다.

찬찬히 나물이름을 가르쳐주시는데도 어릴 때는 죄다 시퍼런 풀떼기였는데, 몇 해를 따라다니니 자연스레 이름과 모양을 구분하게 되었다. 엄마가 바쁠 때는 혼자서도 나물 캐러 나갔다. 시키는 일 같았으면 싫다 했을지도 모를 터인데 내게는 재미진 소풍 같은 시간들이었다.


꽃다지, 벌금자리, 쑥, 냉이, 달래, 지칭개, 망초대어린순, 찔레순, 원추리, 돌미나리, 돌나물, 씀바귀, 소리쟁이…

이렇게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자라는 풀들을 ’푸새‘라고 했다.


지난달, 빼꼼 얼굴을 내민 돌미나리를 뜯으러 갔다 오긴 했지만, 음지쪽 여린 쑥 뜯어다 쑥개떡을 해 먹고 싶으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주위에서는 얼마나 먹겠다고 몸생각하라고 핀잔을 하는데, 몰라서 그러겠는가. 그냥 그리운 거다.

고기 묵을래? 나물 묵을래? 나물이요~~~

그리 야채가 좋은데도 살은 찐다. (뭐든 과하면 찌는 법)


그나마 인근에 유성오일장이 열리니 직접 캐러 가지는 못해도, 신나는 나들이가 5일마다 펼쳐진다.

상자를 벌려 진열해 놓은 보기 좋은 나물보다는, 뜨거운 볕을 가리신다고 몸집보다 큰 우산을 얼굴이 뵈지도 않게 쓰시고는 바닥에 앉아, 아기자기 풀어놓은 할머니들의 보따리 좌판으로 발길이 향한다. 몇 번을 썼을지 모를 낡아진 비닐봉지에 촘촘히 담아 오신 나물들. 밤새 다듬었다는 나물들은 따로 손 볼 필요가 없이 깔끔하다. 눈도 침침 하실 텐데 이쁘게도 다듬으셨다.

어지간하면 장이 설 때마다 들리게 되니, 이제는 어디 사시는지, 어디서 뜯어 오시는지, 잠시 쪼그리고 앉아 할매와 짧은 수다를 떤다. 그 또한 즐겁다.


집을 나설 때의 빈배낭이, 골목골목 장을 돌아 집에 들어올 때는 어깨가 묵직해지고 양손에 비닐봉지가 여러 개 들리게 된다. 내가 뜯어 온 나물인양 봉지 봉지 벌려가며 흥이 난다.




자~ 이제부터 펼쳐 볼까유~~  


나물 중에 급이 있다면 나무두릅은 급이 높으리라. 땅두릅도 향이며 식감이며 빠지지는 않는다. 두릅은 데쳐서 초장에 찍어먹는 게 젤루 맛나다. 튀김이나 전을 해서 먹기도 하는데, 내 입맛에는 숙회가 젤이다.


단골이 부탁했다고 뜯어오셨다는 더덕순. 데쳐서 고추장에 무치니 짤깃한 게 비벼 먹으니 최고일세.


일전에 뿌리째 캐왔던 돌미나리 들기름 둘러 고추장에 비빔밥으로 먹으니 몸속 피가 맑아진다.(자고로 생각과 믿음이 약용으로 승화된다ㅋ)


부침가루는 미나리가 대동단결하게만 소량 넣어, 얼큰하게 청양고추 몇 개 추가해서 기름지게 부치면 막걸리 생각이 절로 난다.

여린 미나리는 끓는 물에 약 올리는 것처럼 후딱 넣었다 빼서, 조선간장과 장터 기름집에서 산 들기름을 넣어 짭조름하게 무치면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다.

노지냉이는 꽃대를 금세 올리니 먹는 기간이 짧다. 된장찌개, 동태찌개, 돼지고기 찌개 어디든 올려지면 판도를 바꿔버린다. 역시 쎈 눔이다.


유독 향이 좋은 취나물은 된장에, 쌉싸름한 머위나물은 고추장에, 손가락에 적당히 힘을 실어 바락바락 간이 배게 무치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무쳐놓은 취나물은 빡빡하게 끊인 강된장을 넣어 질퍽하게 밥을 비비면 고추장과는 다른 구수함이 있다.


물김치를 담기도 하는 돌나물. 고추장과 잘 어울리는 식감 좋은 돌나물비빔밥은 입맛이 없는 날 떠올리게 되는 녀석이다.


부추라는 너.

아주 사랑해~ 구하기 쉽고, 쓸모가 다양한 녀석. 봄이 되면서 가격도 참해졌다.

부추 듬뿍, 청양고추 쫑쫑 썰어 넣고, 고추장 푼 벌건 반죽에 들기름 섞어 노릇하게 지져내면 1인 1전으로는 택도 없이 부족하다.


봄나물전에서 빼놓으면 섭할 까죽전. 가죽나무겠지만 어려서부터 그리  들었으니 까죽이 좋다. 고추장에 묻어 장아찌로 만들고 남긴 까죽은 고추장떡으로 먹어줘야 하니 봄판에는 생으로, 데치고, 무치고, 전으로, 튀김으로 먹어대니 입에서 풀냄새가 날지도 모르겠다.


풋마늘대를 무쳐 먹고 아쉬워 밑대공을 심어놨더니 녀석들 신통방통하게 싹을 올린다.(당연한 자연의 섭리겠지만 내겐 대견하기 이를 데 없다. 좀 더 큰 집을 마련했어야 하는데)


향 좋은 돌미나리 조금 남겨, 작은 화분에 심었더니 이리 이쁘다. 허브만 요리데코로 쓰이는 게 아니다. 요리해서 요 녀석 한 줄기 뜯어다 척 올려주면 먹기도 전에 눈호강.





오래전 내 어머니가 해주셨던 된장, 고추장, 간장에 소량의 하얀 MSG가루, 거친 손맛으로 재료 본연의 맛과 향에 충실하게 만든 밥상에 길들여진 입맛. 그래서 ‘우리 엄마가 해준 맛’, ‘우리 할머니가 해주셨던 맛’이라는 감동과 감사와 둘러앉아 먹던 밥상머리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도 있지 않나.

이제는 연로하셔서 본인마저도 희미해졌을 엄마의 손맛이 담긴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사무치게 그리워도 되돌릴 수 없으니, 아쉽게도 그 모든 게 기억 속에서 옅어지고 있다.

요즘엔 식재료들이 다양해 우리고, 첨가하여 색다른 퓨전요리들이 만들어진다. 허나, 나물무침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특별함만을 가지고 단순하게 만들어 먹는 것이 제일이다. 그래서 마늘도 사양한다. 지극히 사적인 입맛에 입각한 표현이니 색다르게 만들어진다고 맛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푸새로 찐 살.

과유불급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래도 봄에만 먹을 수 있으니 후딱후딱 먹어버리고, 또 사러 가야지.

다음 장에도 살 게 많다.

뽕나무순, 오가피순, 엄나무순은 억세 졌으면 어쩌나.


몸이 안 좋다 하시던 등이 굽었으나 유난히 귀여우신 내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할매.

다음 장에 뵐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찬란한 봄나물 수다는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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