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 오는 날의 호사

by 최태경

서점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비 오는 거리를 나섰다.

연일 내린 비로 피해 입은 곳들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개인적으로는 더없이 살기 좋은 날씨다.

선풍기나 에어컨 없이도 뜨거운 밥을 먹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선선한 밤은 불면증에도 위안이 되고,

습기를 머금은 비까지 좋아하니, 그저 땡큐 베리 감사.


하나의 단점이라면, 나이가 나이다 보니 몸이 기상청.

비가 오기 전이면 어김없이 삭신이 쑤신다. ^^


손 치료는 도침과 약침으로 바꿨다.

침이라고는 하지만 도침은 거의 마취제 없이 하는 시술에 가깝다.

세 번을 맞아야 한다니 기대를 걸어보지만, 아픈 건 아프다.

이 과정을 지나면 좋아질 거라는 긍정 마인드로 기분을 끌어올려 보려 해도,

요즘은 인내의 용량이 바닥을 친다.


일찌감치 빗소리에 잠이 깼다.

전날 주문해 두었던 샐러드 야채들을 그릭 요거트 소스에 버무려 후다닥 먹고,

파라핀 치료를 했다.

나이 들면 여기저기 삐걱대다 보니, 집에 소소한 치료기는 다 있다.

파라핀 치료기, 저주파 치료기, 부항기, 안마기, 찜질 팩.

찾아보면 더나올지도 모르겠다.


책과 필기도구를 간단히 챙겨 집을 나섰다.

까만 장화, 까만 우산을 쓰고 맑게 내리는 빗줄기를 맞는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투둑거리는 빗소리.

고인 웅덩이에 첨벙이는 발소리.

왜 이렇게 비 오는 날이 좋은 걸까.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서점에서 도독(盜讀ㆍ몰래 읽기) 중이다.

몇 해 전 이사하며 겪었던 짐 정리,

그중 가장 마음 아팠던 건 가구도, 전자제품도 아닌

오랜 시간 자식처럼 키우던 화초와 책이었다.


그때의 상처가 남아, 쉽게 책을 사지 못한다.

그래도 못 참고 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도서관을 이용하고,

도서관에 없는 신간은 이렇게 서점에서 도독한다.

(출산하듯 책을 내셨을 작가님들과, 책 한 권 팔기 위해 애쓰시는 서점 사장님께는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ㅜㅜ)


허리가 아파 다리가 저려올 즈음이면 일어나야 한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끔찍한 수술을 통해 배웠다.

발가락이 신호를 보낸다.

아쉬움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380페이지까지 읽었다.

잊으면 안 된다.

예전에는 수첩에 꼭 기록해 뒀지만,

이젠 사소한 것도 외우는 습관을 들이려 한다.

그래서 여러 번 되뇌인다.


380. 380. 380…


기억 확률은 반반이지만,

다음에 딱 그 페이지를 펼쳤을 때 맞아떨어지는 기쁨은

작은 이벤트에 당첨된 것처럼 즐겁다.


서점 건물을 나서니 비는 소강상태다.

검색해 두고 벼르고 있던 카페에 들렀다.

역시 SNS의 힘은 대단하다.

전에 카페 하던 자리가 몇 번 바뀌더니,

새로운 시그니처 커피를 내세우며 오픈했다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매장 안은 만원이다.


혼자가 좋은 순간.

운 좋게 남아 있는 틈새 1인석에 앉았다.


‘코코넛 스무디 커피’

베트남 커피라는데, 코코넛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원하고 먹을 만하다.

연유가 '킥'이라던데, 단맛은 패스하는 타입이라 연유 없이 마셔도 괜찮았다.



책은 잠시 덮고,

창밖을 바라본다.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걸어간다.

다들 바쁘다.

쉼 없이 굴러가고, 서둘러 어딘가로 간다.


주변 소음이 멀어지고,

내 시간만이 고요히 멈춘 것 같다.


호사(豪奢).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최고의 사치다.


부디,

내일도 오늘만 같기를.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은 정말,

조 으 다~




비 오는 날엔

빌리 에반스의 피아노가 스며든다.

https://youtu.be/Nv2GgV34qIg?si=s4_NQlZLQA7PGhKY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분좋은 후유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