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 사회 문화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 · 극작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베르테르 체험’이라고 불리는 사랑, 곧 케스트너라는 약혼자가 있는 가정적인 여성 샤를로테 부프와의 괴로운 연애를 경험한 것은 1772년 5월 4일부터 같은 해 9월 11일까지 베츨라르에 체류하고 있을 때였다. 이 경험과 케스트너의 친구 예루잘렘의 자살 사건을 토대로 그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해 발표한 것은 1774년 9월이었다.
‘베르테르의 시인’으로 단번에 유명해진 괴테는 1775년 11월 초에 바이마르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도 7세 연상의 유부녀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깊은 연애에 빠져 바이마르 전기 10년 동안 지속적인 ‘베르테르 체험’을 맛보게 되었다. 궁중 시인 타소의 사랑과 고뇌를 그린 희곡 『토르쿠아토 타소』는 그런 뜻에서 ‘승화된 베르테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괴테는 그 뒤에도 몇 번이나 ‘베르테르 체험’을 경험하고 그 정신적 갈등을 시적으로 승화해 내는 것으로 고뇌를 극복했다. 특히 1809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친화력』에는 그 체험과 반성이 가장 농후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베르테르 체험’은 1822년 여름 73세의 늙은 시인이 17세의 소녀 울리케 폰 레베초에게 느낀 열렬한 애정이었다. 1832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시인은 평생 동안 베르테르와 같은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출처: 절대지식 세계문학]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폭발적 인기를 누릴 때 여성들은 모두 베르테르 타입의 남성을 원했다.
그래서 베르테르가 자살할 때 입었던 노란 조끼가 대유행을 했고 남성 패션에 일대 변화가 왔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조지 고든 바이런, 1788. 1. 22~1824. 4. 19. 영국 출신 시인으로 작품과 특이한 개성으로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시집 〈게으른 나날〉을 출판하며 시인의 길로 들어섰고,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출처: 다음 백과]의 시(詩)가 여성들 가슴을 설레게 했을 때도 모두 그의 스타일을 따라 하기 바빴다.
바이런은 건강이 좋지 않아 얼굴이 창백했고 한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결국 건강한 청년들이 파리하게 보이기 위해 굶고 멀쩡한 다리를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무엇을 선망하고 동경하느냐에 따라 납득하지 못한 일들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신민회 사건으로 옥살이할 때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과연 내 아들이다. 평양감사가 된 것보다 기쁘다”라고 했다. 생신 축의금을 가져온 아들을 크게 혼내고 권총을 사주며 독립운동을 격려했다.
삶에는 돈보다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요리사는 손님이 원하는 요리를 만들어 주고 세상은 구성원이 원하는 지도자를 만들어 준다.
물고기를 부패한 어항에 넣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랄 수 없듯 돈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수는 없다. 어항을 맑게 만들어야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다.
의(義), 청렴, 배려 등 존경의 대상이 바뀌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