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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캘리그래피 석산 Aug 15. 2023

제42편_ 어하 술비야

1871년 고종 8년 칠산(전라남도 영광군의 임자도, 송이도에서 전라북도 부안군의 위도에 이르는 서해바다를 말한다) 앞바다에서는 목이 터지도록 풍장(豊壯) 소리를 내질렀던 조도(鳥島) 어민들이 있었다.


“어하 술비야 / 이 술비가 누 술비냐 / 박생원네 술비라네 / 어하 술비야, 어하 술비야 / 술비로구나 / 이 술비가 어디를 갔다가 때를 찾고 / 철을 찾아 또다시 왔구나 / 그물코가 삼천이면 걸릴 날이 있다더니 / 우리네 망자에 배꽃이 피었다 / 오동추야 저 달은 밝은데 임 생각이 절로 난다 / 어하 술비야 / 술비로구나 / 어하 술비야 / 술비로구나”  


조선 말엽부터 조도 어민들이 닻배 조기잡이를 하면서 힘든 노동을 이겨내기 위해 불렀던 노동요로 여기서 ‘술비’는 조기를 끌어올리는 그물을 뜻한다.  


보통 ‘닻배’는 선원이 15명 내외로 그물 3~8 백발을 배에 싣고 조업이 시작되면 그물을 바닥에 닿도록 닻을 달아야 하기 때문에 1m 내외의 무거운 참나무로 만든 닻 50~60개 정도 싣고 다니는 배를 말하는데 지금의 유자망(流刺網, drift net: 조류를 따라 그물을 흘려보내 물고기가 그물코에 걸리거나 감싸게 하여 잡는 데 사용하는 어망)의 일종으로 병풍 그물을 쓴다.

조선후기(1871년 고종 3년) 칠산 앞바다에서 닻배 조기잡이 하는 모습

보통 조기 조업은 이른 봄부터 5월 중순 전후인 소만(小滿: 24 절기 중 하나로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며, 음력 4월, 양력 5월 21일께이 된다.)까지 계속 바다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조업을 하기 때문에 애로가 많았다.  

어쩌다 만선이 되면 조기받으러 돌아다니는 상고선을 부르기 위해 돛 꼭대기에서 배 바닥까지 흰 백목 한필을 깃대 삼아 내려걸어 놓고 풍장 북을 쳤다고 한다.  


1928년 전남도내 조기 어획고는 총 236 만관으로 일본 어민이 65 만관, 한국어민이 171 만관(72.5%)의 어획고를 올렸는데, 그중 진도 어민이 36 만관(15.2%)으로 일본 어민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당시 진도 어업은 주로 조도 어민들의 몫이었다.


그 당시 조도 어민들의 조기 조업이 얼마나 왕성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조도군도 전역에 닻배 조기잡이가 성행했으나, 대규모 닻배 호황의 중심은 ‘나배도(전남 진도군 조도면 나배도리 소재)’였다고 한다.  


그 후 광복 직전, 일본의 중선배가 등장하면서 닻배의 쇠퇴기를 맞게 되면서 6.25 이후 기동성을 갖춘 발동기 어선과 안강망 어선에 밀려 자취를 감추게 된다.  


어쩌면 새섬 조도의 노래 '어하 술비야'는 152년의 역사 중 가장 돋보였던 노동요가 아닌가 싶다. 그 찬란했던 조도 어부들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은 마음으로 폐목에 글자를 담았다.


*서각 비하인드>>

1. 뱃사람들의 질곡진 삶을 노래 한 '어하 술비야'는 그 옛날 조도 어민들의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현존하는 그 시대의 뱃사람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몇 명만 남아 역사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2. 정신의 끈을 놓지 못하는 그들에게 '어하 술비야'는 생계를 떠나 자부심으로 다가온다. 젊은 날 할아버지ㆍ아버지를 따라 조기잡이를 나갔던 박정인(87, 진도군 조도면 신전길) 씨는 지금도 조기철이 다가오는 이른 봄날! 드넓은 영광 칠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어깨춤을 추며 애절한 '어하 술비야'를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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