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아"
어딜 가도 누구에게도 어지간해서 지지 않는 사람인데, 유일하게 내가 져주는 나를 지게 만드는 존재가 내 옆에 매일이고 붙어있다.
긴 연휴를 보내고 오랜만에 등원해서 피곤했는지 하필이면 저녁시간에 짜증이 폭발한 나의 아기 빵두리.
벌레 잡는 전기채를 가지고 놀다가 '타닥' 소리가 나기에 깜짝 놀라 괜찮냐고 물었을 뿐인데, 나의 놀람에 더 놀라서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정말이지 별 것 아닌 일에 소스라치게 잘 놀라는 나를 닮아 할 말은 없지만, 진짜 놀라게 하려는 게 아니었고 혼내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잘 놀라는지 왜 하필 이런 걸 닮았나 싶다.
가뜩이나 몸은 피곤한데 아주 좋은 핑계였다 싶었는지 밥을 앞에 두고 눈을 감고 엉엉 울기 시작한다.
아무리 달래도 달래 지지 않고 너무 졸렸는지 침대에 누워 잘 기세다.
'그래 너 누워 자버려. 나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졸리다고 나한테 짜증이야? 그러니까 졸리면 낮잠을 자라고!!!!!!' 소리를 있는 대로 질러버리고 싶다.
그런데 일단 그대로 두면 저녁도 먹지 않고 정말 아침까지 잘 기세로 당장이라도 깊은 잠에 빠질 것 같다.
그놈의 밥이 뭐라고 참. 어른이라면 그냥 두겠는데 아직 애니까 깨워야 한다.
깨우면 또 짜증이 폭발한다. 애나 어른이나 배고프고 졸리면 예민하긴 마찬가지다.
나 정말 억울하다. 피곤한 몸 일으켜 기껏 밥 차려줬더니 자기를 깜짝 놀라게 했다며 엉엉 울어대고 짜증 내는 아이에게 사과해야 한다. 미안하다고. 그게 아니었다고 변명을 하며 아이의 마음을 달래줘야 한다.
아이는 아직 왜 짜증이 나는지 무엇 때문에 몸이 피곤하고 화가 나는지 잘 모를 뿐더러 그걸 표현하는 데는 당연히 서툴고 어리숙하다.
그럼 어른인 나는 이렇게 자주 반복되는 상황에 여전히 왜 화가 날까? 잘 모르는 아이이고 그냥 차분히 기다려주면 될 것을 왜 그게 어려울까?
나의 앞서가는 불안에 그 불안을 다스리지 못해 화가 나나보다.
사실 한 끼 안 먹는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날 때는 지났고, 내가 화가 나서 소리 한번 지른다고 애 인생의 방향이 변할 만큼 커다란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 끼 안 먹어서 큰일이 날 것만 같고, 내가 화 한 번 내면 애가 큰 상처를 받고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만 같다. 미리 말도안되는 최악의 상황을 예측하고 걱정한다. 그리고 그 불안이 화가 난 감정을 만들어낸다.
내가 조금만 덜 긴장하고 조금만 더 느긋하게 바라본다면
아이는 스스로 그 감정을 조절하고
불필요한 감정소모에서 자유로워질 날이 올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당하지 않게 느긋하게 잘 지켜봐 주는 게 내가 할 일이지 싶다.
사실 차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하고 부정적 감정에 압도당했던 것은 나였다.
지더라도 멋있게 담담하게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게 그렇게 잘 져주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다. 그래도 오늘은 내리는 눈 보며 신나고 즐겁게 놀고 기쁜 감정만 들고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