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뭐라고
11월이다. 바야흐로 김장의 계절
엄마는 이제껏 한 번도 김치를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된장도 담아서 먹으니 말이 더 필요 없지. 지난 주말은 엄마가 김장을 하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결혼 전에는 오빠와 내가 도왔고, 결혼 후에는 남편과 언니까지 합세해 김장을 했다. 올해는 이제 막 돌이 돼가는 조카가 있어 우리끼리가 나을 것 같다며 오빠네는 오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지난주 내내 남편 회사 이사가 겹쳐 한 주 동안 중노동을 하고 온 남편이다. 그런 남편에게 김장을 하러 가자는 게 미안했고 심지어 오빠네는 안 오니 더 미안했다.
어쩌겠나 엄마에겐 그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인걸.
내가 남편 눈치를 본다고 하면 남편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지만 나라고 어떻게 눈치를 안 보겠는가. 나도 눈치를 본다. 그날이 그랬다. 아침 일찍(그래 봐야 10시까지 갔지만) 일어나 아이 밥을 챙겨 먹이고 최대한 남편을 시켜 먹지 않았다. 엄마네서 아이 저녁까지 먹고 올 요량으로 아침 설거지거리는 대충 담가 두고 아이 밥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김장은 생각보다 양이 얼마 없었고, 다른 때보다 수월하게 일찍 끝났다. 아빠가 사 온 올해 첫 방어회에 수육까지 배불리 먹고 기분 좋게 하루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오는 길 마트에 들르자 얘기했던 게 내겐 숙제처럼 남아 서둘러 가자며 집을 나섰다.
아이 데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은 얼레벌레 오후 다섯 시 반이 됐고 그놈의 밥.
아이 밥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져 살 거 빨리 사고 집에 가자며 평온해 보이는 남편을 재촉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여섯 시 반. 웬걸 밥이 없네? 그제야 아침에 밥을 하지 않고 나온 게 생각났다. 햇반도 없고 사러 나가자니 애매하고 그냥 누룽지를 끓여줘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불을 올렸다.
그렇게 동동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애 밥은 나만 걱정하는 느낌이지?
-너는 지금 찝찝함이 없지?
아니 있는데
-그런데 왜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아?
그럼 나한테 햇반 사 오라고 할 거잖아. 근데 사러 가기 싫어~ 너도 귀찮잖아?
-맞는데, 밥은 왜 나만 신경 써야 돼? 이건 우리 공동의 책임이야.
공동의 책임이라고? 밥솥 마지막에 본 게 너잖아.
.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적어도 주말에 애 밥은 공동의 책임이란 얘기를 하는데 왜 마지막에 본 게 나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내가 공동의 책임이라고 말한 게 황당하단다.
내가 마지막에 밥을 줬으니 밥 없는 건 내가 아는 게 당연하다는 말을 하는 거다.
이제 전쟁이다. 본연의 의도는 온데간데없고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 스타트!
늘 이런 식으로 대화가 엇나간다.
나는 평소 쌓인 이야기를 오늘을 빌미로 이야기하고 남편은 현재를 이야기한다.
남편은 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좋게 그때 바로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맞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차분하게 그 말을 하면 그만인데 굳이 맞지 않는 타이밍에 이야기를 했고, 분란 아닌 분란을 만들었다.
나는 복잡하고 남편은 단순하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자존감을 남편은 알리 없다.
생각해보니 지금이 일을 그만두고 딱 1년이 지난 시점이다. 늘 일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너의 등골 빼먹는 일이 나의 목표이자 꿈이라 말하는 나였지만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얼마 안 되는 돈을 벌었어도 나름대로 만족했고, 사회생활이란 것 자체로 행복했다. 내가 그만둔 이유는 단 하나 주말에 쉬기 힘든 일이라 가족과의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녀 그래도 좀 나아졌지만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반가울 리 없다. 치워도 치워도 매일 거실이 제자리인 양 널브러진 장난감 정리, 하고 나면 또 나오는 빨래, 오늘은 뭘 먹여야 하나 하는 밥 걱정, 부지런히 쌓이는 먼지와 머리카락 빨아들이기, 매일 저녁 아이 목욕시키기 등 뭐 하나 뚜렷한 성과가 보이는 일이 없다. 희한하게 아이 등원하고 미친 듯 시간이 흐르는데 밤만 되면 내가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잘 해내야 그나마 본전인 일들이다.
집안일은 해봐야 티도 안 나고 아이는 실컷 먹이고 입히고 씻겨도 한방에 몸무게가 쑥 는다거나 키가 훌쩍 눈에 띄게 크지도 않다.
엄마인 내가 아이를 집에서 키운다고 해서 내 아이의 인성이 그리고 정서가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조차 지금은 알 수 없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나는 마음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있다. 그래서 별일도 아닌 일에 죽자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억울하면 눈물부터 나고 눈물이 나기 시작하면 이런저런 감정이 뒤섞여 이야기를 차분히 해낼 능력이 내겐 사라진다.
그나마 감정 정리가 된 후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에 마흔이 가장 큰 숫자인 아이에게 엄마는 일이 마흔 개나 있어 그 일 다하면 잘 때 들어온다며 나갔는데 남들 sns에 아이와 행복한 사진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또 눈물이 났다. 눈물 질질 짜고 있던 나의 찌질함이란.
휴 그깟 밥이 뭐라고 제기랄.
화낼 일이 아닌데 못난 자존감을 이상한 방식으로 풀고 말았다. 이건 남편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고, 내가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내 마음의 문제.
알면서 쉽게 고운 말이 나가지 않는다.
매번 미안하다는 남편의 말로 끝이 나는 일이지만, 사실 대부분 내 뜻을 따라주고 늘 나를 지지해주는 남편은 미안할 게 없다. (굳이 미안해야 한다면 내 첫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 하하..)
그래서 매번 사과를 받는 내 마음도 찝찝하고 이겼지만 늘 지는 싸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