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로의 진입은 10대를 내내 짓눌러온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선언이었다. 그 시절은 온통 설레고 기쁜 것들로만 채워진 무구한 계절이었다. 서른은 다르다. 분명 사고는 아직 스무살 어디즈음에 멈춰있는데 세상은 나를 훌쩍 어른이라 부른다. 이제는 어른이라는 타이틀로부터 도망쳐선 안되며, 기어코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 어깨를 누른다. 20대에 두고와야 할 것들, 좇았으나 끝내 닿지 못한 서글퍼진 꿈들이 발치에 가득하다.
어느 날 마셨던 맥주 한 모금에서 기어이 서른을 마주하는 내 처지와 퍽 닮아 있다 느꼈다. 맥주를 입에 담는 순간 자몽, 귤, 오렌지 껍질 같은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먼저 올라온다. 첫맛의 달큰함이 지나간 자리에 이내 고이는 것은 홉의 쌉싸름한 뒷맛이다. <제주 펠롱에일>. '펠롱'은 제주 방언으로 '반짝이다'를 뜻한단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익숙한 것들만 늘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20대 초반만 해도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맥주 첫 모금의 향처럼 강렬하고 낯설었는데, 이제는 세상의 많은 일이 예상 가능한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이를 두고 '익어간다'거나 '연륜이 쌓인다'고 말하지만, 나는 가끔 이 익숙함이 나를 시시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겁이 난다.
집착과 좌절, 그리고 아주 간간이 터지던 성취의 맛. 나의 20대는 그야말로 펠롱에일처럼 시트러스와 홉이 격렬하게 교차했다. 욕망으로 겹겹이 쌓인 10년이었지만, 그 쌉싸름한 홉의 맛을 견디게 한 건 문득문득 코끝을 스치던 사랑 덕분이었다. 떳떳하게 내세울 성취라곤 고작 생활비를 벌어다 주는 회사와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뿐이지만, 그 사소한 반짝임들이 모여 나의 10년을 지탱했다. 별것 없는 하루들이 모여 결코 별것 없지 않은 10년을 만들어냈다.
서른의 반짝임은 20대의 그것처럼 요란하지 않을 거다. 눈부신 광채보다도 그 뒤에 가려진 씁쓸함을 비로소 제 맛이라 인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스무살보다 쌉쌀한 여운을 기꺼이 삼키는 것. 쏟아지는 조명이 아니라, 어두운 방안에 아주 잠깐 스며든 햇살에 먼지가 반짝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정도의 감각. 그 찰나의 상큼함과 뒤따르는 씁쓸함을 한데 섞어 마시며, 나는 나의 서른을 조금씩 수긍해가는 중이다.
서른의 펠롱에일이 이토록 깊은 맛이라면, 마흔의 나는 과연 어떤 잔을 들고 있을까. 그때의 나는 쓴맛 뒤에 숨은 더 깊은 단맛을 찾아내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먼지 같은 반짝임조차 온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아는 진짜 어른이 되어 있기를 빌어본다. 모든 게 뻔해지는 세상에서 내가 무엇도 놓지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