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공주 키우는 육아대디의 응원가
최근에 '핑크 노 모어'라는 말은 접했습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잠시 한국을 떠나 있던 저로서는 본국의 트렌드를 한참 따라잡고 있는 중이라서 모르는 게 많습니다. 혹시 모르실 분들을 위해 잠시 소개하면 '핑크 노 모어'는 "집단 지성의 힘으로 애니메이션, TV 방송, 인터넷 방송, 도서, 광고, 웹툰, 영화, 음악 등 각종 미디어 속 불편한 콘텐츠들을 수집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변화한 사회를 반영한 보다 실효성 있는 가이드라인 및 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데 필요한 아카이빙 자료를 축적하고, 이를 활용한 인식 개선 캠페인"으로 이어간다고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그룹은 '정치하는 엄마들'(http://www.politicalmamas.kr/)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99%가 공감할 내용으로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어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 된 진이는 핑크공주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로 입는 것을 좋아합니다. 공주가 나오는 이야기도 매우 좋아합니다. 머리에 티아라를 꽂고 외출하는 걸 좋아하고 엘사 드레스를 입는 걸 좋아합니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예전엔 "진이 정말 멋진데"라고 말하면 "멋진 건 남자한테 하는 말이고 여자한테는 예뻐"라고 대답할 정도였습니다. 진이 아빠는 아들만 삼 형제인 집에서 자랐고 진이 엄마도 '핑크'와는 거리가 먼 성향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진이의 '핑크핑크' 성향은 엄빠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색깔로서 핑크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왜 여자는 핑크여야 해'라고 물어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도와주려고 합니다. 얼마 전 공중파 뉴스 여성 앵커가 안경을 쓰고 출연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TV 뉴스 앵커가 안경을 쓰는지 안 쓰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던 저에겐 신선한 화두였습니다.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남자 앵커는 이미 많이 안경을 쓰고 나왔더라고요. 'TV에 출연하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이 정말 강하긴 한 모양이더라고요.
미디어에 비치는 바깥세상과는 사뭇 다른 '예쁜' 여성들. '예쁜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을 미래의 딸내미를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패션, 화장품, 다이어트, 성형수술... 끝도 없이 밀려들 뷰티 산업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길러줘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돌이켜보면 진이도 '사회생활'을 참 많이 했습니다. 태국에서 한인교회 부설 유치원에 다녔고 국제유치원에도 다녔으니까요. 친구들 선생님 이웃들 가족 친지들에게서 무수히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미디어도 빼놓을 수 없지요. 진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과 동화책 그림책은 진이에게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세상입니다. 우리 집 작은 사람이 스스로를 고정관념이라는 작은 틀에 가두지 않기를 원하는 저는 부지런히 원인을 찾아봤습니다.
진이 집엔 그림책이 많습니다. 대부분 물려받은 책들이라 오래된 것들이 많지요. '예쁨으로 승부하는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님'이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종종 있어요. 물론 다른 책들도 많이 있지요. 하지만 진이는 귀신같이 공주 이야기를 꺼내 듭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아직 글을 줄줄 읽을 수 없어 답답한 진이는 아빠에게 책을 읽어달라면서 가져옵니다. 하지만 공주 이야기는 사절. 안 읽어줍니다. 대신 다른 공주 이야기를 권해 봅니다. 그림책 도서관에서 양성 평등에 가까운 공주 이야기를 골라 꺼내봅니다. 하지만 일곱 살 어린이의 고정관념도 굉장히 강합니다. "이건 엉터리잖아. 이런 공주가 어딨어"라며 외면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새로운 책들을 보여주며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바빠서 이것저것 아이들에게 골라줄 시간이 없는 엄빠들을 위해 <편견, 고정관념, 차별 없는 세상을 담아낸 동화 또는 그림책 전집>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