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 BMW, 아우디, 폭스바겐, 포르쉐 모두 독일 자동차 회사다. 이 중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자동차로 한 가닥 하는 나라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독일 참 대단하다. 독일엔 이 자동차 회사들을 기리는 박물관들이 곳곳에 있다. 그중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것이 벤츠, BMW, 포르쉐의 박물관이다. 브랜드의 인기나 명성보다는 박물관 자체의 규모나 완성도로 평가한 3대 박물관인 것 같다. 벤츠와 포르쉐의 박물관은 슈투트가르트에 있고 BMW의 박물관은 뮌헨에 있다. 난 진작에 이 박물관들을 모두 가봤고 이제야 하나씩 비교해보려 한다. 첫 번째는 3대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벤츠 박물관이다.
나는 한 때 자동차를 참 좋아했다. 초딩 6학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여러 유명 자동차 블로그를 매일 들락거리며 신차 출시 소식, 해외 자동차 래이스 소식 등을 챙겼더랬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좋아하는 자동차는 BMW이지만서도 벤츠의 저 로고만큼은 자동차 업계 최고로 뽑고 싶다. 저렇게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로고는 다른 업계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을 것이다. 진짜 최고라면 스스로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저 로고엔 그런 자부심이 느껴진다.
벤츠 로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자 박물관 앞에서 벤츠 포즈를 취해보았다. 나의 다리를 쭉 벌려 벤츠의 삼각별을 표현했다... 굉장히 저러고 싶었다. 벤츠의 정수를 모아 놓은 벤츠 박물관 앞에서 벤츠와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벤츠 박물관은 슈투트가르트에 있다. 슈투트가르트는 그렇게 큰 도시까진 아니지만 독일 일기예보에서 전국도를 보여줄 때 빠짐없이 나오는 정도 위상의 도시다. 박물관이 지하철 역과는 좀 거리가 있어서 내린 다음에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근처에 벤츠 아레나였던가 축구 경기장이 있는데 경기가 있는 날은 코앞까지 지하철 운행을 한다는 것 같다.
박물관을 평가함에 있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은 세 가지다. 박물관 자체의 디자인은 어떤가, 관람 시작부터 끝까지의 스토리텔링은 어떠한가, 소장품들이 매력적인가. 벤츠 박물관은 이 세 가지 면에서 모두 최고였다. 독일에서 자동차 박물관을 딱 하나만 가야 한다면 당연 이 곳이다. 자동차란 무엇인지 기업의 박물관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모두 알려줄 것이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일단 박물관 자체부터가 예술적인 건축물이다. (미적 감각 부족한 내 눈에는 조개껍데기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물관 주위에 다른 건물이 없고 살짝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서 박물관으로 다가갈수록 우러러보게 되었다. 실내 역시 관람객의 동선이 굉장히 편하도록 짜여 있다. 맨 위층에서 시작해 둥그렇게 돌며 내려오는 구조인데 중간중간 박물관 전체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포인트도 있다. 관람 내내 동선과 시선이 모두 편안했다.
이렇게 가운데가 빈 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박물관의 규모도 크다는 뜻이다. 곳곳의 전망 포인트에 서면 맞은편과 위아래층의 전시실이 한눈에 보이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되짚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물관 전체를 이루고 있는 콘크리트(?) 실내 재질이 벤츠라는 굵직한 자동차 회사와 잘 어울렸다. 벤츠의 럭셔리한 이미지보다는 금속, 에너지, 힘을 다루는 자동차 산업의 본질과 더 맞닿아 있는 인테리어라는 인상을 받았다. 권위와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기반이 되는 것은 결국 단단한 기술력일 테니 말이다.
확실히 박물관이 통이 크다. 어느 박물관을 가도 시대를 구분하거나 박물관 구역을 나눌 때 '설명하는 벽'(?)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그런 거 잘 읽지 않고 지나가는 편이긴 한데. 아무튼. 벤츠 박물관은 설명하는 벽의 크기도 엄청 컸다. 저렇게 한쪽 벽을 전부 사용해버린다. 빼곡한 설명을 더 읽고 싶게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하나의 포토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한 컷 찍고야 말았다.
벤츠 박물관을 다른 두 곳의 박물관과 확실히 구분 지어주는 부분이 벤츠의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이라고 거창하게 쓰긴 했지만 말 그대로 박물관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말이다. 이 생뚱맞은 말 앞에서 벤츠 박물관이 시작된다. 이 뻔뻔하게 생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자동차 이전 인류의 최초의 교통수단은 말이었다'라는 평범한 의미.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진짜 벤츠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말 다음은 벤츠다'가 아닐까. 말은 참 오랫동안 인류의 No.1 교통수단이었다. 벤츠의 설립자 칼 벤츠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1885년 칼 벤츠는 세계 최초의 가솔린 엔진 자동차를 만들었고 이후 자동차의 시대가 열린다. 두 시대 사이의 획을 그은 것이 바로 벤츠였던 것이다. 다른 회사들을 그저 후발주자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 모형이었다.
말 이후 최초의 벤츠 자동차부터 시작해 시간순으로 박물관이 진행된다. 내부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현대 자동차에 가까워지는 구조다. 눈여겨볼 것은 전시실과 전시실 사이 통로마다 붙어 있는 사진들이다. 20세기 세계의 중대사들이 시간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차례대로 우드스탁 페스티벌, 나팔바지의 유행, 독일 통일, 인터넷의 등장, EU의 설립 등이다. 자동차 박물관에서 웬 갑자기 세계사 시간? 좀 생뚱맞지만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았다. 이렇게 다양한 사건들이 세계를 조금씩 바꿔나가는 동안 벤츠는 자동차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위의 전시를 통해 자동차로서 벤츠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1대 1로 대응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벤츠가 오랜 시간 세계와 함께한 유일무이한 브랜드라고 주장하는 게 아닐까.
더불어 분위기 환기의 효과도 있었다.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교수나 강사는 수업에서도 수업 얘기만 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적절히 딴 얘기도 해줘야 집중력도 높아지는 법이다. 이 박물관도 분위기는 클래식하지만 이 정도 센스는 겸비했나 보다.
마지막 사진의 주제는 Future of mobility다. 자동차의 미래란...? 근데 가만 보면 마지막은 사진이 아니다. 사진이 있어야 할 곳엔 CCTV 영상 같은 게 나오고 있었다. 이게 뭔가 하고 보니 상단의 카메라가 정면을 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엔 갑자기 내가 화면에 나오길래 "여러분이 자동차의 미래입니다~"이런 의미인가 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고서야 깨달았다.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맞은편 전시실에는 벤츠가 제안하는 미래의 자동차들, 특히 친환경 자동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시의 타이틀도 New beginning이다.
어떤 박물관이든 가장 기본적인 전시 형태는 '시간순'이다. 차이는 방문객들에게 어떤 식으로 그 '시간'을 전달하는가에 있다. 벤츠는 100년이 넘는 기업이다. 얼마나 할 말이 많았을까. 저 사진들을 보면서 벤츠가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려주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구나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의 센스도 딱 적절했다. 이런 것도 일종의 배려고 노력이다. 가만히 있어도 관심받을 회사가 박물관 내의 단 하나도 그냥 만든 게 없다.
별 자동차가 다 있다. 정말 별별 자동차가 다 있다. 이상하게 생긴 소방차부터 최첨단 경주용 머신까지 벤츠 박물관에는 바퀴 달린 모든 운송 수단이 최소 한 대 씩은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를 100년 넘게 만들었으니 정말 안 해본 시도가 없는 것 같다. 진짜 '벤츠 박물관'이 아니라 '자동차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될만한 곳이었다. 이런 엄청난 스펙트럼이야말로 다른 어떤 회사도 따라올 수 없는 이 박물관의 특장점이다.
그중에서도 이런 클래식카 아니 클래식을 넘어서 'Ancient 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자동차들이 많다는 점이 박물관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그도 당연한 것이 저 당시 자동차를 만들던 회사가 몇 개나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회사가 벤츠 말고 있기나 할까. 벤츠 브랜드의 풀네임 이기도 한 '메르세데스'는 1900년대 초쯤 생산된 다임러사의 고성능 자동차다. 이후 다임러와 벤츠가 합병되어 다임러-벤츠가 탄생하고 오늘날 메르세데스 벤츠의 모기업이라 할 수 있는 다임러AG가 된다. 이런 복잡한 얘기는 제쳐 두더라도 자동차가 아직 마차의 모습과 가깝던 시절의 모델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설렐 수 있었다.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공기역학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를 안 했다기보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고 고려해야 할 만큼 자동차가 빠르게 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의 디자인이 훨씬 장식적이고 화려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개다가 자동차가 경제적일 필요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자동차가 대량 생산되기 이전엔 초상류층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기름값을 걱정하기보단 성능과 외형이 중요했을 것이다. 지금과는 자동차의 개념이 완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벤츠 박물관을 걷다 보면 자동차가 인류 역사에서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까지도 보인다.
글 쓰기 전에 키야 한번 하고 가자. "키야!~~~~~~." 클래식과 첨단이 공존한다면 이 자동차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이 자동차의 상징성도 어마어마하다. 벤츠는 럭셔리 자동차의 대표라 여겨지지만 스포츠카 쪽에서도 큰 일을 하나했다. 바로 저 위로 열리는 문, '걸윙도어(Gull Wing Door)'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문이 처음 적용된 자동차가 바로 1954년(!) 등장한 300SL이다. 걸윙도어는 이후 탄생하는 시저도어(Scissor)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내 생각..). 한 때 위로 열리는 문은 슈퍼카의 상징과도 같았다. 문이 저절로 위로 열리고 주인공이 딱 내리는 장면 영화에서 많이 봤을 것이다. 요즘엔 제작의 어려움이나 안전성 때문에 잘 쓰이진 않지만 '멋'의 기준에서 저 문보다 매력적인 자동차 문이 있을까.
암그(AMG)는 벤츠 산하의 고성능 튜닝 전문 브랜드다. 안 그래도 뛰어난 성능의 벤츠를 튜닝해 괴물급으로 만들어 내는 회사다. 원래는 벤츠에서 나온 기술자가 독자적으로 설립했으나 이후 벤츠가 암그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자회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두 회사가 함께한 시간이 상당한 만큼 박물관에 암그를 위한 구역이 별도로 있었다. 이런 차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겉모습도 화려하긴 한데 저 보닛을 열면 어떤 엔진이 들어 있을지, 시동을 걸면 어떤 배기음이 들릴지 두근두근 거린다.
보통 박물관을 견학하고 나면 전시 내용에 대한 기억이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벤츠 박물관을 나온 다음에는 박물관 그 자체에 대한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다. 그 공간에 대한 인상이랄까? 하나의 기업, 하나의 주제를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박물관은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 같다. 루브르, 대영 박물관 같은 만물 박물관에선 느낄 수 없는 감상이었다. 심지어 카페테리아에서 파는 베이글 샌드위치도 맛있었다. 그래. 완벽한 박물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