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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정석 Dec 26. 2018

바티칸의 저주

시스티나 성당에서 길을 잃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0미터는 훨씬 넘어 보이는 이 길고 긴 줄을 기다려야 한다니. 개다가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니! 모든 게 시스티나  성당 안에서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니! 



베드로 성당&광장과 입장 대기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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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더웠다. 8월의 로마는 어딜 가나 온통 뜨끈뜨끈 했다. 바티칸 시국의 입구인 성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서서 그 더위를 온몸으로 느끼자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기 위한 줄은 그 거대한 광장의 둘레 절반 길이만큼이나 이어져 있었다. 나는 한 시간 째 그 줄 어딘가에 끼여있는 참이었다. 시간을 어떻게든 빨리 흘려보내려 귀에 꽂았던 이어폰 때문에 슬슬 귓구멍이 아파왔다. 너무 덥고 지쳐서 어떤 생각까지 했냐면, 내 앞에 서 있는 사람 그림자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래서 진짜 숨어 보려고 가까이 붙었더니 매섭고 불편한 눈초리만 얻어맞았다. 인정. 내가 잘못했어요. 그래도 진짜 너무 덥잖아요. 


하지만 이 더위보다 울화가 터지는 건 내가 이 모든 기다림을 생략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생략'은 어떤 요행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나의 당연한 권리였다. 그럼에도 난 그 간편한 지름길을 뻥 차 버리고 세상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을 뒤로 돌려보자. 많이도 아니고 한 두 시간만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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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스티나 성당 안에 있었다. 보통 바티칸 관광은 베드로 성당인 아닌 바티칸 박물관에서 시작된다. 바티칸에 갈 때 구매하는 티켓도 이 박물관의 티켓이며 베드로 성당 입장은 무료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 투어 서비스를 이용한다. 한국인 투어 그룹도 상당히 많고 대중화되어 있어서 재밌는 투어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난 똥고집이 발동해서 무턱대고 혼자 들어갔다. 투어 따위, 여행은 내가 보고 느끼는 것으로 충분해. 이런 생각으로 말이다. 


일반인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다들 몰래 찍는다) 사진출처 : lonelyplanet.com


시스티나 성당. 박물관 견학 후반부에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이 작은 성당에서 나의 운명이 갈렸다. 미켈란젤로의 엄청난 작품을 보다가 목이 뻐근해질 때쯤 뒤로 돌아서 출구를 찾았다. 그런데 출구가 두 곳이었다. 기분이 싸했다. 오른쪽? 왼쪽? 어디로 가야 하지. 혼자였던 난 내 감을 따랐다. 때마침 왼쪽으로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난 왼쪽으로 돌았다. 몰랐다. 오른쪽으로 가야 베드로 성당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것을. 왼쪽은 진짜 레알 출구로 연결되어 있었다. 진짜 박물관을 아예 나가버리는 출구. 박물관을 나가 버리면 다신 돌아올 수 없고 베드로 성당 입장을 위해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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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 줄어들어도 기쁘지가 않았다. 베드로 성당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어리석음을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바티칸 박물관 티켓을 사놓고도 지름길을 가지 않은 나의 용맹함 때문에. 가이드는 필요 없다던 나의 대단하신 자신감 때문에. 그렇게 더위 속에서 날려버린 두 시간 때문에! 철판 위의 삼겹살 꼴이 되길 자처했으니 저주라 부를 만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누구를 탓하랴. 혼자 투어에 나선 나의 자업자득것을. 나 같은 바보가 나 하나만은 아니었길 바라며 쪼잔한 심술을 부리는 게 전부였다. 

여기서 더 한심한 건, 내가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 왔다는 점이다. 한 여름에 긴 검정 바지를 일부러 챙겨 왔었다. 아니 바티칸은 반바지 입으면 못 들어간다며?...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언제부터 남의 말 그렇게 잘 들었다고 착실하게도 긴 바지를 챙겼다. 아마 핫팬츠 정도 길이만 아니면 되는 것 같았다. 이 모자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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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서 헤어 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베드로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더위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 어떤 대가를 치렀더라도 아깝지 않을 장관이 펼쳐졌으니까. 단언하건대 난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데 이 거대한 성당이 주는 감동은 믿음을 가리지 않았다. 



수많은 인간이 하나의 무언가를 믿었을 때 과연 어떤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베드로 성당이 제격인 듯하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런 성당을 짓도록 이끌었다. 성당의 화려함이 날 압도했고 섬뜩하기까지 했다. 유럽을 여행하며 수많은 성당을 봤다. 스페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독일 쾰른 대성당, 영국 세인트폴 성당 등등. 모두 대단했지만 베드로 성당 앞에선 평범했다. 

 

마지막으로 쿠폴라에 올랐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베드로 성당의 높다란 돔을 말한다. 이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늘 하루 개고생이 완전 납득되었다. 내가 이 장면을 보려고 이 곳에 왔구나. 그래 이 정도면 퉁치자. 바티칸을 헤매느라 하루를 다 써버렸지만 뭐 어때.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는 저 광장 위에서 반물질 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이번엔 이 광장 위에서 나의 여행 감성이 터져버렸던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바티칸은 웅장하면서 음흉한 곳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웅장하다. 화려하고 섬세하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의 중심지이니 어지간하겠는가. 동시에 음흉하다. 모든 장소가 비밀스러운 상징들로 가득 차있다. 길바닥의 돌멩이에도 상징이 있을 것만 같은, 그리고 심지어 진짜 상징이 있는 그런 곳이다.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의 팬이라면 바티칸이라는 비밀스러운 작은 나라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미켈란젤로베르니니라는 현실감 없는 천재들의 숨결이 바티칸 곳곳을 이루고 있다. 여전히 바티칸 어딘가 지하엔 우리가 모를 시설이 있을 것 같고 으스스한 의식이 거행되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정말 시스티나 성당에서 저주에 걸렸던 건지도 모르지. 이런 곳에 별생각 없이 뻔뻔하게 들어갔던 자에게 내려진 벌이랄까. 그 덕에 좀 더 찐득하게 바티칸을 느끼고 돌아온 것 같다. 비록 종교인은 아니지만 이 글을 빌어 한 마디 하죠. 감동과 감탄을 가득 담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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