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정석 Oct 25. 2018

베를린에서 아포가토를 마셨었다.


    베를린 여행은 손에 꼽히게 힘든 여행이었다. 3일 정도를 머물렀는데 앞의 이틀 동안 7만보 정도를 걸어 다녔다. 3일째에는 조금만 걸어도 종아리가 당겨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베를린 여행 방법은 잘 못 됐다. 베를린은 저렇게 무식하게 여행할 곳이 아니다. 베를린은 뭐랄까 껄렁껄렁 다녀야 한다. 난 마지막 날에야 이를 깨달았다.


    베를린을 보여줄 땐 이런 사진을 보여주고 싶다. 다른 도시의 경우엔 파리-에펠탑, 로마-콜로세움처럼 지겹더라도 무의식 중에 연결되고야 마는 고리들이 있다. 베를린은 그런 게 없다(관광할 게 없다).응? 그렇다기보다 저 모습이 베를린이다! 베를린에서 랜드마크 사진을 찍어봐야 그건 베를린이 아니다. 부란덴부르크 문이나 국회당사 같은 명소가 있긴 하지만 글쎄. 베를린을 명소로만 소개한다면 유럽을 여행할 때 뮌헨에서 맥주만 마시고 독일을 떠나는 사람들만 늘어갈 것이다. 



    베를린에선 동쪽으로 걸어야 한다. 동으로 갈수록 이 곳이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느낌은 사라져 간다. 대신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이 눈에 띈다. 공장이었는지 기차역이었는지 창고였는지 원래 목적을 알아볼 수 없는 건물들이다. 그리고 도시 전체가 도화지인 듯 수많은 그라피티들이 그 건물을 뒤덮고 있다. 아무런 규칙도 없는 그라피티와 덕지덕지 붙은 전단지의 흔적이 베를린의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 낸다. 이런 건물들 중엔 밤이면 클럽으로 변신하는 곳도 있고 주말마다 아기자기한 벼룩시장이 열리는 곳도 있다. 



    내가 동으로 향한 건 일요일이었다. 금토 내내 시끌벅적했을 베를린의 밤은 잔잔한 일요일의 오전을 남겼나보다. 벽화로 장식된 옛 공장지대를 지나 마주친 주택가는 한적했다. 딱히 수식할 말도 생각나지 않던 거리에 간판도 제대로 없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야외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몇몇 사람들 아니었으면 그곳이 카페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여행 피로에 찌들어 커피가 땡겼던 것도 있지만, 뭔가 되게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 베를리너(베를린사람)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카페인과 당이 모두 부족했던 난 아포가토를 시켰다. 커피를 기다리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카메라와 가방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익숙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있던 서너 명의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뭔가에 대해 열심히 얘기 중이었다. 주문을 기다리는 손님들은 카페 직원과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곤 했다. 하나도 통일되어 있지 않던 실내 가구들마저 자연스러웠다. 그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난 기분이 좋았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 베를린. 특별한 일은 없지만 일찍 집을 나와 커피를 즐기는 동네 사람들. 그 일상 속에 내가 있다니!  

    

    어찌보면 베를린 사람들도 우리랑 별반 다를 거 없는 일상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들도 월요일이 되면 학교에 가야하고 회사에 가겠지. 일하다가 혼나고 팀 동료가 맘에 들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을 떠나 머나먼 곳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보면 내 일상에선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그 날 그들이 누리던 여유, 친구들과의 담소, 맛있는 커피, 생각해 보면 내 일상에도 충분히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새삼 멋있어 보이고 부러워지는 게 여행인 것 같다. 내가 내 일상을 살고 있을 땐 스트레스와 걱정에 가려 저런 것들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여행의 진가는 나의 '일상'을 떠나 다른 사람의 '일상'을 엿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와 머나먼 곳 누군가의 일상에서 내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기대감이 여행을 설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무언가로부터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의 일상을 바라봤듯 좀 거리를 두고 날 돌아보면 내 삶도 아직 살만 하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런 행운을 맛보게 해 주어 베를린 여행은 특별했다. 







작가의 이전글 가우디의 자기애, 까사밀라(Casa Mil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