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쾰른에서 깨달은 하나
한창 여행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난 여행을 다니면서도 여행에 반항하고 싶었다.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오긴 왔는데 그렇다고 꼭 부랴부랴 여행을 해야 해? 여행이 별거야? 왜 다들 그렇게 여행해라 안달이야? 왜 여행을 해야 하고,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문들이었다.
누가 근사한 곳으로 여행을 갔다는 말을 들으면 '난 더 멋진 곳으로 가야지!'라며 질투를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난 여행을 업적이라 여겼던 것 같다. 남들과 비교하며 난 더 대단한 곳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도 여행에 반항하고 싶은 사춘기였나 보다.
쾰른에서의 2박
이 고민이 절정에 달했던 것도 쾰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도 쾰른이었다. 난 이 곳에서 2박'이나' 했다.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2박이면 되겠거니 했었다. 여행 출발 전날에야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쾰른은 볼 게 많은 도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저 쾰른 대성당 빼고는 A급이라 해줄 만한 여행지가 없다. 우스갯소리로 쾰른과 밀라노는 성당만 보고 빠져도 충분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가 봤더니 정말이었다. 가자마자 성당에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성당 주위를 빙빙 돌며 찍을 사진을 다 찍고 전망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왔다. 그래도 시간은 아직도 오후 네시. 난 앞으로 남은 40여 시간의 쾰른 여행을 내 스스로 채워야만 했다!
여행 와서 이렇게 텅 빈 느낌은 처음이었다. 같은 시기에 모로코로 여행을 간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의 사진 속 아프리카 모래사막에 비해 쾰른은 너무 평범했다. 도심 길거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아도 신선함과 낯섦을 만날 수 없었다. 이번 여행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일단 왔으니 돌아는 다니겠지만 '독일 이니까, 독일로 교환학생 온 의리로 다니자!'라며 날 위로했다. 그렇게 터벅터벅 걷다가 라인강변으로 나왔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강 생각이 나서 나도 그냥 강둑에 눌러앉았다. 어디 가고 싶은 곳도 없었고 갈 만한 곳도 없었으니까. 5월 초였어서 날도 적당히 시원하고 알맞게 따듯했다. 글쎄. 이 여행 될대로 되라지!?
......ㅎㅎ 저렇게 강둑에 드러눕고 나서 여행이 조금씩 바뀌었던 것 같다. 살짝 실망한 나 자신에 대한 위로 같은 것이었지만, 모든 여행이 볼거리로 넘쳐날 필요는 없지 않는가. 가는 곳마다 로마, 바르셀로나, 파리 같지는 않을 거 아닌가. 단지 새로운 곳에서 그 공간의 작은 움직임들을 관찰하는 것으로도 여행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텅 빈듯한 여행을 내가 스스로 채울 수도 있잖아?!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까 실컷 봤던 대성당이 건너편에 보였다. 그래 다시 둘러보아도 특별한 건 없었다. 하지만 난 '볼만한 것'을 새롭게 정의했다. 난 여행하면서 무엇을 보고 싶었더라. 과거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멋진 것? 그런 것들만 보고 싶었다면 내 여행을 관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난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시작할 때 용맹히 암흑의 지도 속으로 뛰어드는 일꾼들처럼 새로운 곳을 보고 싶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그냥 '쾰른'이었다. 쾰른에 뭐 특별한 게 있어서도 아니다. 독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며 사연도 많은 그 도시를 보고 싶었던 거다. 그러자 내 주위가 온통 볼거리로 바뀌었다.
먼저 쾰른 대성당 뒤로 넘어가는 노을이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노을이 질 때까지 강가에 앉아 마냥 기다렸다. 노을을 보고 다니 이번엔 야경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해가 아예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서머타임 때문인지 해가 저녁 10시는 넘어서야 졌다. 중간에 잠시 스타벅스 갔다 온 시간을 빼도 저 날 라인강변에만 4시간은 있었다. 여행하면서 한 장소에 이렇게 오래 머물렀던 적은 또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더니 이런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있던 강둑의 위치가 정말 완벽했다. 가장 쾰른 다운 뷰 - 라인강, 대성당, 호엔촐른 다리가 한눈에 보였다. 세 컷으로 요약했지만 그동안 정말 많은 것을 보았다. 평온한 라인강, 드문드문 다리를 지나는 기차들, 각각 강물과 하늘을 떠다니던 배와 구름 이 모든 흐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대성당에 꽂힐 듯 떨어지던 태양과 차가워지는 바람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여행에 관한 기억은 만화책처럼 남아있게 마련이다. 하도 많은 장면을 짧은 시간 안에 보고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쾰른에서의 시간은 영상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쾰른에선 노을이 어떻게 지는지 난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런 모습들이다. 쾰른에서 살아가는 쾰른 사람들의 모습. 내 시선이 다소 변태 같았을지도 모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 여행을 떠났고 가서는 CCTV마냥 사람들을 관찰해대고 있으니. 변명을 하자면 내가 그 장소를 기억하는 방식인 것 같다. 그곳의 사람들을 유심히 보는 것 말이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맥주는 어떤 건지, 이런 시간에 조깅을 하고 있는 건 또 누군지, 이 곳의 남녀는 어떻게 서로 속삭이는지를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이런 장면들이 어우러져 쾰른이 되는 거라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그들 한 명 한 명이 쾰른의 상징이었다.
이런 여행 저런 여행
쾰른으로 가기 전에 여행을 갔던 곳이 런던이다. 런던은 정말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곳이었다. 지금도 난 베스트 여행지를 꼽으라면 런던을 뽑는다. 하지만 다시 런던에 갈 수 있다면 쾰른에서와 같은 여행을 하고 싶다. 런던이라는 도시에 더 녹아들 수 있는 여행 말이다. 쾰른 이후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갈 때에도 쾰른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처럼 여행하고 싶었다. 베를린에서도 파리에서도 좀 더 그 지역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세상엔 이런 여행 저런 여행이 참 많다. 난 그렇게 흘러 흘러 여행을 다니다가 그나마 나의 여행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 나의 일탈과 다른 이들의 일상이 교묘하게 접하는 지점, 그때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과 감동이 좋다. 결국 되게 단순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보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