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직업은? : 교사입니다.
- 왜 교사가 되었죠? : 아... 이건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대학 입학시험 면접 볼 때 교수님도 내게 이 질문을 하셨는데 아주 형식적으로 답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사람은 보통 처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소중한 줄 모른다. 물과 공기, 또는 가족처럼. 그것을 잃거나 어떤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당연한 것이 아님을,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
내게 '교사'라는 것도 그랬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1989년 당시,
국립사범대는 국가가 발령의 책임을 지고, 국립사범대 졸업생은 일정 기간 교사로 복무할 의무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꿈이 교사였던 것도 아니었지만, 교사가 여자로선 안정적인 직업이란 주변의 권유에 적당히 타협한 선택이었다.
대학 입학하고 채 2년도 되지 않아 '국립사범대생 우선 발령제도'가 위헌 판결 결정이 나서 국립사범대, 사립 사범대, 교직이수, 그 출신과 상관없이 모두 '교원임용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교사로 임용될 수 있게 변경되었다.
제도 변화의 시시비비를 여기서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아무튼 국립사범대생들은 나름의 명분을 갖고 격렬히 저항했지만 실패로 끝났다(나는 대학교육과정을 임용시험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전락시킨, 시험성적 위주 선발방식의 현 '교원임용시험' 제도에 여전히 반대하며, 독립된 교원양성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학기 수업을 거부하며 투쟁한 결과는 유급, 선배 동료 간의 불신과 상처 등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성숙하는 법이다.
나는 그 시기, 우리 교육이 처한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 갖기 시작했고, 나아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도 넓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왜 교사가 되려고 하는지,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원임용시험'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내가 그 시험을 친다는 자체가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교사의 꿈은 접고, 대신 연구자의 길로 가기 위해 대학원 준비를 했다.
그러나 대학 4학년 때, 한 달간 교생실습을 하면서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당시 나의 담당 지도 선생님은 퇴임을 앞둔 평교사셨는데, 나에게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임용시험을 쳐서 꼭 교사가 되라고 말씀해주셨다.
내 안에서 교사가 되고픈 열망이 다시 꿈틀거렸고, 결국 진로를 바꾸어 교원임용시험을 치기로 했다.
그러나 시험에 낙방했고, 설상가상 대학 졸업하던 해 교통사고로 인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내 삶 자체를 흔들어놓았다.
1년 정도 방황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 역시 내 삶의 좌표를 재설정하고 나 자신이 한층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다시 준비해서 친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1995년, 여중에 첫 발령을 받아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나는 그렇게 교사가 되었다.
- 어떤 교사였나요? :
간절했던 만큼 역시 교직은 나의 천직인 듯 여겨졌다. 처음부터 ‘수업 예술가, 학급 운영 전문가’가 되겠다는 다부진 목표도 세웠다. 도움될 만한 연수는 전국으로 직접 찾아다니고, 교사모임에도 적극 참여해 활동했다.
발령 4년 차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옮겼고, 그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직장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나는 철저한 계획형 교사다. 담임을 맡으면 미리 1년 학급운영 계획을 세우고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 물론 아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 달간의 솔선수범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 달이 지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급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갖고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함께 하는 공동체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학급 일기, 모둠 일기 등을 통해 아이들과 글로 소통하며 서로 마음을 열고 가까워진다. 아이들은 나를 '이벤트 전문가'라 부를 만큼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소소한 이벤트는 공부로 찌든 아이들 마음에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한다.
출근하는 차 안에서는 항상 아이들과 보낼 하루를 그려보는 버릇이 있다.
'수업은 어떻게, 오늘 학급 아이들과 함께 할 활동은..’
이런 생각을 하며 즐거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학년 말에는 일기, 기타 아이들의 글과 사진, 학급활동 등을 정리해 '학급문집'을 만들어 함께 나눈다. 아이들에게는 평생의 추억이고, 나에게는 교직생활의 기록이 되는 셈이다.
일이 많으니 항상 바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근무하면 야간 자율학습 때도 남아 있어야 하고,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어 퇴근할 때가 많다. 고3 담임을 맡으면 토요일에도 출근한다. 방학 때도 보충수업, 교사 연수가 있다.
당연히 ‘엄마’란 역할보다는 ‘교사’에 무게 중심이 더 기울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미안할 때가 많았지만
‘내가 학교 아이들 잘 가르치면, 내 아이는 그 학교 선생님들이 잘 보살펴 주시겠지.’
그런 마음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때론 '남의 아이들 가르치느라 제 아이는 뒷전'이란 주위의 따가운 질책도 감수해야 했다. 아이 둘을 낳고 길렀지만, 육아휴직도 한 번 하지 않고 쉼 없이 달렸다.
적어도 교직 15년 차 정도까지는 출근길이 설레는 ‘행복한 선생님’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무리 입시교육에 찌들었다 하더라도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노래하며 ‘꿈, 희망’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고등학교마저 철저히 서열화되고 일반 공립학교 아이들의 무력감이 커져갔다.
'교실 붕괴’란 말이 공공연히 나오게 될 즘이었을 것이다. 교실에 들어가면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책상 위에 엎드려 있어 아이들을 깨우다 지쳐버리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환하게 한 번 웃으면 모든 힘겨움이 또 눈 녹듯 사라지는 터라 그렇게 하루하루 견뎠지만, 교사의 사명감만으로 ‘버티는’ 건 슬펐다.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으니, 교사도 행복할 수 없었다. 마음도 몸도 지쳐 방학만 손꼽고 있는 내가 한심하고 싫었다.
교사가 되고 처음으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한데 아이들이 커서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 시기도 지났고, 방법이 없어 고민할 때,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평생에 한 번, 1년 무급휴직을 신청할 수 있는 안식년 제도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저거야!’하며 신청 공문을 기다릴 때쯤, 남편이 베트남 주재원으로 파견 발령이 났다.
만약 5년쯤 더 전에 해외 발령이 났다면, 나는 가야 할지 말지 엄청 고민했을 것 같다. 학교를, 나의 일을 접고 남편을 따라간다는 것은 강제로 유배당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기는 절묘했다. 어느새 ‘열정’이 ‘의무감’으로 변해 힘겨울 때였으므로 ‘동반 휴직’은 달콤하게 느껴졌다.
교직 생활 21년 차에 접어들던 2016년 2월이었다.
- 휴직 이후? :
베트남 하노이에서 교사도, 워킹맘도 아닌,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내겐 엄청난 변화이고 도전이었다!!
그 이야기를 앞으로 적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