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부터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방학을 이용해서 세계 여러 곳을 다녀본 '나'지만, 베트남은 처음이었다.
‘다낭’이나 ‘하롱베이’는 이미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베트남의 유명 관광지였고(코로나 19 이전까지 가족 해외여행지 Best 1위는 ‘다낭’이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TV 여행 관련 프로그램들이 유행하면서 베트남의 더 많은 지역이 알려지고,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베트남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게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으로 기억되는 나라였다. 하노이에 오게 되면서 세계지도에서 베트남을 처음 찾아보게 되었는데,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쪽을 따라 그리 길쭉하게 생긴 나라인 줄도 몰랐다(국토의 직선거리는 1,650km, 해안선의 총길이는 무려 3,444km).
베트남의 수도가 ‘호찌민(과거 사이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노이’고, 베트남은 일 년 내내 더운 나라인 줄 알았지만 호찌민이 있는 남부지방이 그렇고, 내가 사는 하노이는 북부 쪽이라 4계절이 있고 겨울에 제법 추운 편이었다.(영상 10~20℃ 정도, 오토바이가 주 이동수단인 이곳 사람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는다)
베트남 지도
남편은 하노이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하이퐁’이란 도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이퐁은 우리나라의 엘지전자 공장이 들어와 있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이다.
남편은 업무가 바빠 나보다 2주 먼저 한국에서 출국하였고, 나는 해외 이삿짐을 베트남으로 부치는 등 한국에서의 뒷정리를 맡았다.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하는 딸의 짐을 기숙사에 옮겨주는 것으로 한국에서의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둘째 딸 손을 잡고 하노이 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소감은, 여느 여행을 떠나 낯선 공항에 내린 것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은 낯설지만 곧 제2의 고향처럼 친근한 곳이 되겠지' 의미부여를 하며, 여기저기 더 눈여겨보게 되는 듯했다.
베트남 도착 이후 나의 첫 일정은 마중 나온 남편과 남편의 직장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한국에서라면 남편의 새 근무지에 아내가 인사 차 방문한다는 것이 상식적인 일은 아닌데, 베트남 사람들은 아주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했다.
새로 부임한 책임자가 직원들에게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고 함께 하는 것을, 베트남 직원들은 가족처럼 친근한 관계 맺음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베트남을 2주 먼저 체험한 남편의 설명이 그다지 미덥지는 않았지만, 해외 주재원으로 새 출발하는 남편을 적극 내조하겠다 약속한 나로서는 남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을 만나면 주려고 면세점에서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그 역시 2주 선배인 남편이 당시 베트남에서 핫한 한국화장품 브랜드를 알려주어 선물 고르는 고민을 덜어주었다. 남편에게 그런 세심한 면이 있을 줄이야.. 20년 넘도록 함께 살아온 남편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또 하나, 내가 야심 차게 준비한 선물 하나가 더 있었으니 직원들에게 ‘베트남어로 인사하기’였다. 한국에서 ‘베트남어 회화’ 책 한 권을 미리 준비해서 갔는데, 하이퐁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몇 문장을 열심히 외웠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해프닝이었다.
남편 직장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50명이 넘는 직원들의 기립박수와 환호를 받고 얼떨떨했지만, 처음 만나는 외국인들에게 그토록 따뜻한 환대를 받으니 가슴 뭉클하기까지 했다.
나는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준비한 선물을 건네며 인사했다. 베트남 직원들은 대부분 ‘안녕하세요~’하며 한국말로 인사해주었다. 나도 그들의 언어, 베트남어로 화답하는 것이 예의 아니겠는가. 마음속으로 베트남어 인사를 미리 준비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뿌듯해했다.
그러나 베트남어로
'신 짜오~: 안녕하세요’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의욕과잉이 부른 대참사’ 라고나 할까, ‘무식이 용감’이라고 했던가...
나는,
‘신 짜오~ 젓 부이 드억 갑아잉, 헨 갑 라이 ; 안녕하세요, 처음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세 문장의 베트남어를 완벽하게 외워 인사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직원들이 나의 베트남어 인사에 깜짝 놀라며 기뻐해야 하는데 인사를 할수록 뭔가 ‘이게 아닌 것 같은데...’란 찜찜함이 생기고, 그들이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지?? 분명 정확하게 말했는데...
베트남어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뭐가 문제였는지 눈치챘으리라.
베트남어는 ‘6 성조’가 있어서 같은 단어, 같은 발음이라도 성조가 다르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또한 베트남어에서는 호칭이 굉장히 중요한데, 관계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매우 복잡한 편이다.
그런데 나는 성조와 호칭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다 무시하고 책에 쓰인 대로 외워 말했다. 성조를 무시한 나의 말을 그들은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거다.
그중에 '아잉(Anh: 오빠란 뜻의 호칭)'이란 단어는 성조가 없어 유일하게 알아들은 단어였을텐데, 차라리 못 알아듣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직원들은 모두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고, 심지어 남직원보다 여직원들이 더 많았는데, 그들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오빠'라고 호칭한 셈이었으니...
그 날 직원들 눈에 나는 도대체 어떻게 비쳤을까??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 베트남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난 뒤였으니... 부끄러움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아무튼 베트남 입성 첫 이벤트는 그렇게 어설픈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베트남어를 열심히 공부하게 만든 자극제가 되기에는 충분했으니 비극적 결말은 아닌 셈이다.
베트남에서 전업주부로 살기, 내게 주어진 그 첫 번째 과제는,
해외 생활 정착에 가장 중요한 ‘살 집 구하기'와 '아이가 입학할 학교 정하기’였다.
보통의 경우, 남편이 먼저 베트남에 건너와서 가족이 들어와 살 집을 구하고, 아이가 입학할 만한 학교 몇 군데를 탐방하여 상담한 뒤 아이의 입학시험 및 면접 날짜를 미리 잡아놓으면 그때 가족들이 들어온다고 한다.
아니면 이주하기 몇 주 전에, 집 문제와 아이 학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리 한 번 베트남을 방문하기도 한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 또한 수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인데, 내가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므로 그때 일찍 알지 못한 것이 어쩜 다행이었으리라. 아니면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테니.
남편은 해외에서 새로운 업무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오랜 직장생활을 해본 나로서는 충분히 예상되는 바였다.
이제 나는 워킹맘이 아니고 전업주부로 살게 된 만큼, 집안일은 남편 신경 쓰이지 않게,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1년 동안 직장과 집안일 둘 다 하면서도 살았는데, 한 가지만 하면 뭐 힘든 게 있으려고?’
자신만만하던 그 호기와 여유로움이 와장창 무너져 내리는 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