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기록2] 여름의 속옷
기나 긴 브래지어 토너먼트, 그 끝
입추가 지났지만 여전히 기온은 30도 근처, 습도는 만땅이다. 이런 날에는 옷을 한 장이라도 덜 입어야 그나마 덜 더운 느낌이 든다. 위 아래 옷을 입느니 원피스 한 장 걸치는 편이 바람도 잘 통하고 활동하기 좋다. 집에서는 봉제선조차 많지 않은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지만, 외출시에는 겉옷 뿐 아니라 위 아래 속옷까지도 챙겨 입어야 하니 고역이다. 윗 부분에 착용해야 하는 속옷은 아주 골치아프다. 특히 여름엔 더더욱. 거추장스러운것을 싫어하고, 몸에 닿는 물건에 지나칠만큼 예민한 나로선 브라가 주는 갑갑함을 이 골칫덩어리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꽤나 긴 시간동안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브라를 착용한 것은 이차 성징이 나타나던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와이어 있고, 단단히 모양이 잡힌 형태의 브라를 착용한것은 아니다. 늘 착용하던 런닝에 도톰한 천이 덧대진 형태가 내가 처음 접한 브라였다. 중학교 들어갈 때를 전후해서 일반적으로 브라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그런 형태의 것을 착용했던것 같다. 사실 기억이 뚜렷하진 않다. 당시에는 엄마가 사주는걸 그냥 입었으니까. 어떻게 보관해야 하고, 어떻게 착용해야 하고, 어떻게 관리해야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착용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공개된 공간에서 가슴이나 브래지어 같은 단어를 나열하는 것이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 십 년 조금 넘게 산 아이에게 속옷이란 불편함조차 언급해서는 안될 수치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사춘기를 기점 내 가슴은 근 10여 년 간 맞지 않는 브래지어로 인해 혹사당하기 일수였다. 밑가슴둘레를 고려하지 않고 입은 브래지어는 숨쉬는 것 조차 버겁도록 상체를 옥죄었고, 제대로 관리 하지 못해 천을 뚫고 나온 와이어는 여린 살을 찔러들어가 상처를 남기기 일수였다.
이런 일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내 또래들은 모두 남모를 비밀을 가슴에 품고 살았고, 이는 곧 소녀들의 공감대가 되어 주었다.
대학시절을 보내던 중 브라렛이라는 신문물이 등장했다. 답답하게 가슴을 조이던 밴드도 없고, 언제 튀어나와 피부에 상처를 남길 지 모르던 와이어도 사라졌다. 당시 반응은 반반이었다. 와이어가 없어서 가슴이 쳐진다는 의견과 세상 둘도 없이 편하고 이제라도 해방 되어 기쁘다는 의견이 나왔다. 물론 나는 후자. 해외 여행을 하면서까지 사왔던 브라를 내팽겨치고 편한 형태의 브라렛과 스포츠브라를 착용했다. 더이상 나를 억압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으리라 여겼지만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이었으면 이 글은 서두조차 쓰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브라렛의 하늘하늘한 레이스는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게 만들어 브래지어 리그에서 탈락했다. 스포츠 브라는 특유의 형태때문에 가슴에 땀이 더 많이 차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그 이후 찾은 물건은 니플 패치였다. 다행히(?) 가슴이 매우 작은 편이라 쳐지거나 고정시켜야 할 필요가 없기에 포인트만 잘 가리면 되겠단 생각으로 찾은 니플패치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패드처럼 두꺼워서 땀이 차지도 않고, 착용 후 정성 들여 빨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었다. 샤워 하면서 슥 떼어내면 되니 탈착의 번거로움도 없었다. 그렇지만 니플패치가 브래지어 토너먼트의 우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역시나 내 몸이 문제였다. 작은 자극에도 쉽게 발진이 생기 피부 위에 매일 접착 성분이 닿고 떨어지길 반복하자 생채기가 쓰라리도록 생겨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나에게 꼭 맞는 브래지어를 찾기 위해 캡이 달린 런닝, 실리콘 누브라 등 여러 대체 브라를 탐험했지만, 내 마음에 쏙 드는 브래지어를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
지난 초여름, 친구가 생일 선물로 구O브라를 건내줬다. 익숙하지만 낯선 브래지어였다. 스포츠 브라에 내장된 패드처럼 생겼는데 차이점을 꼽자면 재질일 것이다. 마감면이 매끈하게 처리된 내장패드와는 달리 가슴에 닿는 부분은 면으로 되어 있고, 바깥 쪽은 탈지면을 압착시킨 후 보풀을 약간 만들어 낸 듯한 느낌이었다(찾아보니 양면 모두 폴리에스테르라고 하는데, 가공방식의 차이인듯 하다). 구O브라는 런닝처럼 딱 붙는 옷을 입고 그 안에 착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장 가슴을 편하게 만들어 주면서 사회적 시각으로 보기에도 불편하지 않은 차림새를 만들어 주었다. 패드도 여타 브래지어의 것 처럼 두껍고 형태가 단단하다기 보다는 굉장히 슬림하고 유연해 조물조물 쥐어 빨아 아무데나 올려둬도 한나절이면 마른다.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처음에는 거슬리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지만 삼 사일 정도 착용하니 금새 적응되었다. 구O브라가 지금까지의 토너먼트 참가 브래지어 중 가장 왕좌에 가까워진 브라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중학교 철모르던 시절부터 내 곁에 있어준 소중한 친구는 내 브래지어 여정기를 모두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무려 속옷 회사에 근무한 이력이 있다. 친구가 속옷 회사에 근무하던 당시 직원가로 싸게 구매해준 팬티를 구멍 나도록 입은 것을 알게 된 친구는 자신이 구O브라를 하나만 사주면 이것 역시 구멍날 때 까지 입으리라 생각했더랬다. 덕분에 나는 두세트의 구O브라를 번갈아 착용하며 여름을 날 수 있었다. 3개월 정도 매일 착용한 터라 새로 구입할 시기가 되어 구매 사이트에 들어가서 둘러보다 새삼 친구에게 참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친구가 한창 속옷 회사 다니던 당시 나는 위염까지 심해져 더더욱 브래지어 착용에 곤란함을 느꼈고, 이를 본 친구는 본인의 회사에서 가장 편한 라인의 브래지어를 여러 장 구매해 가져다 주곤 했다. 올 여름에도 더위에 약하고 브래지어 착용을 불편해하고 심지어 물건도 잘 안사서 구멍나도록 입는 나를 위해 적절한 제품을 여러 벌 선물해주는 마음씨가 느껴졌다.
이에 나도 무언갈 친구에게 해주어야겠단 생각을 하던 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다 뜨개질로 만든 아주 쿨하고 귀여운 브라탑을 발견했다. 속옷 회사를 그만두면서 20대 초반부터 열정을 가지고 하던 요가를 업으로 삼게 된 친구에게 선물하기 매우 좋아보였다. 더욱이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손뜨개로 만든 물건을 선물한적도 없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 선물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친구에게 가장 편히 입는 운동복 상의 사이즈를 물었다.
흉곽둘레에 맞춰 시작코를 잡자. 이제 시작이다. 가녀린 체구에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묵직함을 가진 친구의 체형을 고려해 밑가슴의 고무단은 좀 더 길게 뜨고 바스트의 곡선을 고려하며 단을 올릴때마다 코 수를 조절하고, 메리야스뜨기를 하는 편이 깔끔해 보이겠지. 브이넥으로 깊게 목라인을 만들면 혹여나 운동하다가 불편 할 수 있으니 목라인은 적당히 가려지도록 만들고. 어깨끈은 너무 얇지 않게, 그렇지만 너무 두꺼워 둔탁해 보이지 않도록 아이코드 형식으로 만들자.
메모지 가득 친구의 체형과 취향을 고려한 문장을 써내려갔다. 그러나 실제 진행율은 0.3%정도. 여전히 시작코 잡은 것에서 크게 진행된 상황이 없다. 더워서 그런 것이리라. 절대 내 마음이 친구의 마음보다 작아서 작업이 더디 진행되는 것이 아니리라. 이번 달 19일에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이 때까지 완성해서 선물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오늘도 손을 움직여 본다. 코 하나에 마음담고, 바늘 움직임 한 번에 정성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