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나 둘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하늘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린 양 거센 비와 벼락을 지상으로 내리 꽂는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이상기후는 한반도에 전례없던 야행성 폭우라는 결과로 돌아왔다.몇 해 전부터 여름이면 열대야와 사이좋게 손잡고 방문하는 야행성 폭우로 인해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잠 못드는 이가 비단 나 하나뿐은 아닐 것이다. 번쩍이는 섬광에 뒤이어 대지를 쪼개는 천둥소리에 놀라 깨는 것이 일상이 된 듯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잠들어도 쉬이 깨는 사람은 스스로 초대한 이 한밤중의 손님이 영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대는 밤새워 쿵짝 쿵짝 속시원히 놀고 후련한 마음으로 사라지겠지만, 한낱 인간은 당장 4시간 후에는 출근을 해야 한단 말이오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더욱이 이 년 전 여름 거주지를 옮긴 후 불면의 밤은 더 늘어났다. 이전에는 구축 아파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늘 베란다가 있는 방에서 지냈었다. 당시에도 야행성 폭우는 있었지만 베란다의 외창과 베란다 창까지 이중으로 거센 빗소리와 천둥 소리를 걸러 주었다. 지금 집은 생전 처음 살아보는 베란다 없는 집이다. 거실에서도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우렁차고, 방에서도 벼락소리가 3D 서라운드 사운드 못지 않게 울려퍼진다.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에도 잠을 깨는 사람에게 이 웅장한 자연의 소리는 숙면에 도움되는 백색소음이 아닌 그냥 소음일 뿐이다.
어제도 그제도 해가 떨어지자 천둥벼락 클럽이 폭풍같은 사운드를 뽐내며 영업을 시작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까지 무한정 주어진 시간을 침대 속에서 잠못들어 괴롭게 보내느니 뭐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책상에 앉았다. 유튜O에서 공부할 때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를 검색한다. 빗소리 사이로 음악소리가 꺼질듯 말듯 들려온다. 다음 학기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구매해 공부하고 있던 책을 펴든다.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기록하기 위한 타자 소리가 화음을 더한다. 정신은 점점 한 밤중 꿈을 꾸듯 하얀 종이와 까만 활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시간이 흐르고 목 뒤가 뻣뻣해져 올 즈음이면 건물을 울리던 천둥 소리가 더이상 소음이 아닌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제야 나는 자연이 들려주는 오케스트라를 감상하기 위해 창가로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책을 덮고 밝게 빛나던 스탠드의 빛이 사라지면 오로지 창 밖에서 빛나는 몇몇의 불빛만이 나를 비춘다. 잠시간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자 샛별같이 빛나는 불빛 위로 빗줄기가 곱게 짠 장막처럼 펼쳐진다. 점 하나의 빗방울이 속도를 가지자 선을 그려냈고 그 선들이 수 만, 수 억 모여서 흐르는 시간과 함께 비의 장막을 만들어 냈다. 우리가 4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어서일까.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일이 점, 선, 면 그리고 시간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뜨개질은 하나의 코에서 시작된다. 긴 바늘을 움직여 실을 걸어 빼 내면 하나의 코가 만들어진다. 이 코가 직렬을 이루면 하나의 단이 완성된다. 이제 이 단은 점이 아닌 하나의 선으로 보여진다. 코의 직렬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단이 쌓아 올려지면 편물, 즉 면이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려면 시간의 에너지 역시 필요하다. 내게 도깨비 방망이가 있지 않으니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일히 점을 만들고, 선을 만들고 면을 만들어야 한다. 일전에 가게에서 뜨개인형을 만들고 있던 내게 동료가 이것의 이전 단계가 무엇이냐는 모호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실?"이라는 대답을 주었다. 만일 그 때 내가 이 점, 선, 면 그리고 시간의 이치를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나은 대답을 줄 수 있었으리라.
글쓰기 역시 점과 선 그리고 면과 시간으로 이루어져있다. 하나 하나의 활자가 완성된 문장을 만들고 이 문장은 곧 한 장의 페이지가 된다. 활자 하나에 고뇌와 문장 하나에 정성을 들여야 하니 꽤나 오랜 시간을 할애 해야 함은 물론이다. 꾸준히 뜨개질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숨쉬는 이 4차원 세상의 일원으로 역할을 오롯이 해낸다는 기분을 준다. 늘 폭우 속 거친 바다에서 부유하며 살아오던 내게 닻을 내리고 뿌리를 내리도록 해주었다. 누구에게나 작디 작은 점은 존재한다. 이 점을 선으로 만들어내어 비단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힘들어 지친 자에게 손을 내미는 온정은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도 개인이라는 점으로는 결코 존재 하지 못한다. 가정과 우정같은 선을 만들어내고 국가와 지구촌이라는 거대한 면을 지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록 과학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4차원의 세상과는 조금 다를 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우리의 세상은 점과 선과 면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의 세상인 것이다.
+덧. 이 글을 빌어 이번 폭우로 피해 입은 모든 분들께 위로의 말을 전한다. 나에겐 고작 짧은 글을 쓸 정도의 감상만을 준 밤이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지옥과 재난의 현장이었을테고,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였을테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인 고통스러운 시간을 만들어 준 밤이었을 것이다. 부디 더 이상의 피해와 슬픔이 존재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