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 산책

by 섬세영



나는 걷는 것을 즐긴다. 날이 좋으면 파란 하늘을 만끽하며, 날이 흐리면 대지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흙내음을 느끼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으면서 만날 수 있는 작은 생명들이 소중하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그 길 끝에서 고양이를 만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등 뒤에 집이 있다고 아무데서나 자려는 달팽이를 집어 들어 좀 더 푹신한 곳에서 쉴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다. 물론 나에게 달겨드는 메뚜기에 놀라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뭐가 그리 바쁜지 빠르게 땅 위를 헤엄쳐 가는 송충이를 밟지 않기 위해 스텝을 밟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리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이고, 내어주는 소리들은 너무나 곱고 청아하다.


어제는 참 날이 좋았다. 이런 날을 놓칠수는 없다는 마음에 태산같이 쌓인 일을 잠시 내려놓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가벼운 운동용 가방에 물 한 병과 이어폰만 챙겨들고 나왔다. 집에서 약 15분 정도만 걸으면 하천 옆으로 한적한 산책로가 나온다. 이 곳까지 가는 15분은 차가 맹렬히 달리는 대로(大路)를 끼고 걸어야 한다. 빠르게 달려가는 차들이 내뿜는 기계음과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가 고막을 내려친다. 소음에 취약한 나는 이 소음을 피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귀에는 이어폰을 낀다. 이어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출력하지 않는다. 그저 수 십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려 나가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뿜어내는 소리를 조금이나마 차단해 줄 뿐이다. 어지러운 도시의 소리를 지나 산책로로 들어오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차도에서 고작 이만큼 떨어져 나온 것 뿐인데 이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코끝에 메달린 숨도, 귓가에 내려 앉은 소리도 모두 다 도시의 그것과 다르다.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물은 시시각각 변하는 멜로디를 만들어냈고, 그 위로 풀벌래와 이름모를 새들이 화음을 올려주었다. 끊임없이 귀에 소리가 들어오지만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음악을 듣고자 발을 멈추고 눈을 감고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궁금함이 차오른다.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는 소프라노에게 박수를 보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이제 풀과 나무, 그리고 물이 후각을 자극한다. 누군가는 이 물내음을 맡고선 다 썩어가는 하천의 비린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 물비린내가 인간이 만든 기계장치가 내뿜는 악취에 비할바 못된다 생각한다. 자연이 자연의 냄새를 풍기는 것과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서 나는 냄새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비가 온 다음날의 물비린내는 평소보다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지만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에 비하면 달콤한 수준이다. 바람이 불어오면 풀과 나무의 향이 더해진다. 깊은 베이스노트 위로 차분하지만 경쾌한 미들노트, 그리고 솜사탕 같은 탑노트까지 제 아무리 훌륭한 조향사라도 이 냄새를 구현해 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 어느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눈 앞에 펼쳐진 물새들의 여유로움이 나에게까지 옮은 것이리라. 긴 다리로 겅중 겅중 걸어다니는 백로 옆으로 오리가 둥둥 떠다닌다. 가마우지는 날개를 한껏 펼쳐내어 바람에 몸을 말린다. 하늘과 땅과 물에서 모두 자유로운 새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내가 안고 있던 걱정거리가 별것 아닌 것 처럼 느껴져온다.



고작 차도에서 이만큼 떨어진 곳이고 이 산책로 역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이 자연 속에서 나는 내 존재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콧구멍을 열어 크게 숨을 들이쉬면 오만가지 냄새가 들어오고, 자칫 고요한듯 보여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어느것 하나도 멈춰 있지 않은 풍경을 눈에 담을 수도 있다. 작은 움직임은 또 다시 작은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내가 이렇게 많은 향을 맡을 수 있고, 내가 이렇게 작은 움직임을 살펴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속에 내가 있다. 도시에서 부여받은 직책이나 직함과 별개로 '나'의 존재가 느껴진다. 살아 숨쉬고 느끼는 나를 인지한다. 도시의 삶이란 내 존재를 느끼기 보다는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존재가치를 따질 수 조차 없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삶이다. 이런 곳에서 숨 쉬는 것 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본다는 것 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살다보니 감각기관이 둔해져버린 인간이라니,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날이 좋다는 이유로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와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깊고 많은 고찰하다니, 신체적 운동 뿐 아니라 정신 단련까지 이루어 냈으니 성공적인 산책이라 할 수 있겠다. 오감이 둔해진 도시인들에게 잠시간이라도 차도에서 벗어난 곳의 산책을 권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내가 일개 텍스트로 전하려 했던 그 감동의 감각을 그대들도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