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네잎클로버를 곧 잘 찾아내었다. 동네 하천 옆 산책길에서 풀내음, 흙내음 맡으며 찬찬히 걷다보면 노력하지 않아도 네잎클로버가 눈에 와서 박히곤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20여분 시간동안 버스 정류장 뒤 볕 잘드는 언덕배기에서도 네잎클로버를 찾을 수 있었다. 찾은 네잎클로버들은 옆지기의 핸드폰 케이스로 들어갔다. 오늘은 운이 좋을꺼라며. 나보다 당신에게 행운이 필요할 일이 많지 않겠느냐고.
올 해 들어선 네잎클로버를 영 발견하지 못했다. 항상 걷는 그 산책길을 걸어봐도, 늘 버스를 타던 그 정류장 뒷편을 살펴보아도 네잎클로버를 찾을 수 없었다. 클로버가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얼굴을 내밀던 봄부터 제각각 푸르름을 맘껏 자랑하던 여름에도 그리고 새벽 바람에 서리 앉는 가을이 되어서도 네잎클로버는 그 얼굴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작년 2학기를 끝으로 석사를 수료 했다. '졸업'이 아니라 '수료'이다. 4개의 학기동안 등록금을 내고, 수업에 참여했다는 '수료'. 열심히 했다고 아무리 목청 높혀 말해봤자 결국 나는 제 시기에 졸업하지 못한 낙오자였다. 구태여 말해보자면 사실 나와 입학 동기인 석박생 중 그 누구도 졸업하지 못했다. 박사생은 차치 하고서 석사생들 중에서도 4학기를 마침과 동시에 졸업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 모두가 다 졸업을 못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급함에 사로잡혔다. 내가 가려는 길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자책에 휩쌓였다. 이런 마음이 쌓이고 쌓여 나의 시야는 매우 좁아져 버렸고, 마음 한켠엔 병이 자라기 시작했다.
똑같은 길을 걸어도 이전에 느꼈던 상쾌함과 개운함을 느끼지 못했고,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차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이불처럼 축축 늘어지고 무거웠다. 머릿속은 늘 나에대한 자책과 불안이 가득했다. 좋아하는 뜨개질을 해도 마음 한켠에 부담이 생겨올라왔고, 하염없이 우는 밤이 늘어갔다. 내 상태를 인지하고 있으나 조절할 수 없었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이런 날 죽어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삶을 지속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삶'을 더이상 지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병원에 방문했다. 처방이 내려졌다. 캡슐 하나와 새끼 손톱보다도 훨씬 작은 초록색 알약 하나. 문뜩 클로버가 생각난다. 병원 밖을 나와 벤치 아래 잔뜩 핀 세잎클로버 옆에 가만히 약봉투를 대어본다. 약봉투 속에 든 초록색 알약이 마치 내가 찾던 네잎클로버의 마지막 잎파리 같다. 네잎클로버가 행운을 상징한다면 세잎클로버는 행복을 뜻한다고 한다. 나는 세잎클로버의 밭을 헤메고 있었다. 내 발에 채이는 그 많고 많은 세잎클로버를 뒤로한 채 닿지 않는 행운만을 쫒았다. 대학원에 처음 입학하던 때를 돌이켜 생각해본다. 공부하고 지식을 탐구하는 자체로 행복함을 느꼈던 내가 떠오른다. 조급함과 초조함에 병을 얻으면서까지도 난 눈에 보이지 않는 목표만 내 삶의 전부인양 행동했다. 행복을 뒤로 하고선 절대로 행운을 찾을 수 없다. 이 간단한 원리를 뒤늦게라도 알아채서 참 다행이다.
올 겨울이 조금 더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올해가 가기 전 가득찬 행복 속에서 작은 행운에 기뻐하는 나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