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어질 일은 결국 벌어진다고 했던가? 진짜 그랬다. 기어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샹젤리제 거리를 돌아보며, 부모님들께 드릴 선물을 고르던 때였다.
“장모님, 대답 없으셔?”
“어. 아직.”
“전화해 볼까?”
“안 돼. 통화료가 얼만데!”
우리는 옷가게 앞을 십분 째 서성이고 있었다. 장모님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 좀 힘든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말했다.
“잠깐만. 톡 왔다!”
아내가 외쳤다.
“엄마가 뭐라고 했냐면, ‘난 저런 원피스 필요 없다. 빈손으로 와라. 너희가 사 오는 거, 아무것도 안 받을 거다.’ 이렇게 왔어.”
장모님께 어울릴 원피스를 사진 찍어 보내드렸는데 아무래도 부담스러우신 모양이었다.
“장모님 취향이 아닌가 보다. 다른 걸 찾아봐야겠네.”
내가 목소리를 쥐어짰다.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얼굴은 왜 그렇게 창백하고? 다리는 왜 떨어?”
“힘들다고 했잖아. 못 참겠어.”
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속이 울렁거리고 심상찮더니, 배탈이 난 것 같았다.
”말을 하지 그랬어? 지금 선물 사는 게 문제야?”
아내가 다그쳤다. 나는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노천 식당이 있었다.
“실례지만, 화장실이 있나요?”
자리에 앉자마자, 아내가 물었다.
“물론 있습니다. 마담! 화장실에 가시겠습니까?”
직원이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젊은 남자 직원이었다.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마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이 어디론가 걸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지진 강도는 7.0, 8.0을 넘어 서고 있었다. 뱃속 맨틀이 한층 더 활발히 움직였다. 곧 용암이 배 밖으로 분출될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동료 직원을 데리고 나타났다.
“마담! 화장실이 지하에 있습니다.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가시죠.”
사근사근한 직원이 말했다. 이런! 화장실에 갈 사람은 아내가 아닌데 뭔가 오해한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친구, 힘이 아주 강합니다. 스트롱맨이에요. 마담을 지하 화장실까지 모시고 갈 수 있습니다.”
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맞아요. 저, 스트롱맨이에요.”
동료 직원이 자신 있게 말했다. 말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우리가 단골손님도 아닌데, 저렇게 자청해서 도와주려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에요. 제가 화장실에 가야 되요. 빨리요.”
찢어지려는 배를 부여잡고 내가 말했다.
“젠틀맨? 마담이 아니고 젠틀맨이 가실 거예요? 그건 아주 쉬워요.”
스트롱맨이 말했다. 어쩐지 김이 샌 듯한 말투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롱맨의 팔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팔뚝이 아주 튼실한 총각이었다. 스스로를 스트롱맨이라고 소개할 만했다.
그는 시각장애인을 잘 안내했다. 나보다 반 보쯤 앞서 걸으며, 침착하게 길을 인도했다. 나는 솔직히 좀 놀랐다. 지체장애인을 등에 업고 화장실까지 데려다 줄 직원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시각장애인을 능숙하게 안내해 줄 직원이 몇이나 될까? 역시 선진국의 시민다웠다. 비록 개선문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사근사근한 사내와 스트롱맨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 있는 하루가 될 듯했다. 그만큼 그들이 인상적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건 사람인 듯하다. 아내와 나, 둘만의 오붓한 여행도 좋지만, 때로는 낯선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어울리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유럽 여행뿐 아니라 삶의 여정 자체가 그러할 것이었다.
왼손으로는 난간을, 오른손으로는 스트롱맨의 팔뚝을 잡은 채, 긴 계단을 내려갔다. 음침한 지하에 화장실이 있었다.
지진 강도가 9.0이 된 순간, 용암이 배를 찢고 폭발하려는 찰나, 변기에 앉았다. 그리고 환희를 맛보았다. 성층권을, 별을, 어린왕자를 생각하던 때가 먼 과거처럼 여겨졌다. 하늘을 날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하 화장실에 주저앉아 있었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너무 컸다. 헛웃음이 났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네.”
다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또 한 번 천장 너머의 것들을 그렸다. 화장실이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일을 처리하고 나니, 적잖게 민망했다. 신경 쓰였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을까? 냄새는? 거사를 치르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스트롱맨이 팔을 가져다댔다.
“젠틀맨! 가실까요?”
“네, 스트롱맨!”
젠틀맨과 스트롱맨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왔다.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만약 아내가 걸을 수 있었다면, 혹은 내가 앞을 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스트롱맨과 사근사근한 사내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지 않았을 것이고, 추억을 쌓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결핍인 동시에 우리의 날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