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여! 응답하라 진심으로

by 제삼열


“노을빛이 사그라지기 전에 한잔하자니까. 시간이 별로 없어.”


내가 조바심쳤다.


“먼저 할 일이 있다고 했잖아. 와인 오프너, 있어? 이빨로 뜯을 거야?”


아내가 칼끝을 겨누듯 말했다. 아뿔싸! 오프너가 없구나. 예리한 지적이었다. ‘진작 좀 말하지.’, 조금 얄미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왜? 가정의 평화는 소중하니까. 결코 아내가 무서워서는 아니다.

고민 끝에,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되든 안 되든 오프너를 빌려 볼 작정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오프너로 와인병 좀 따달라고 부탁해 볼 요량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낯선 연장을 잘 다룰 자신이 없었다. 서툰 연장질로 코르크 마개를 망가뜨리면 큰일이었다. 집에 두고 온 정든 오프너가 그리웠다.


역시나 로비는 무척 붐볐다. 체크인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한창 바쁠 시간이긴 했다. 소파에 앉아 로비가 한산해지기를 기다렸다. 바로 전날, 라디오를 들으며 앉아 있던 소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면,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철새들의 이동을 보고 있는 듯했다. 영어,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한국어까지⋯. 온갖 말들이 범람했다. 기도 소리 같기도 하고 독경 같기도 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졌다.


“머리 아파. 조용한 데로 가고 싶어.”


아내가 지친 듯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 폭의 풍경화를 마음에 그렸다. 바다처럼 파란 하늘. 솜사탕을 닮은 흰 구름. 지평선까지 뻗어 있는 푸른 초원. 한가로이 산책하는 코끼리! 아내가 몇 시간 전에 라마르크 거리에서 구상한 그림이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그림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바스락, 바스락, 풀밭을 걷는 코끼리의 발소리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았으면 했다.


“그 코끼리 얘기 좀 더 해 줘. 어떻게 생긴 코끼리야?”


내가 물었다. 아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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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와인을 산 후, 라마르크 거리로 향했다. 몽마르트 언덕과 라마르크 거리는 이웃해 있었다.

거리가 한적했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었으므로, 행인이 많지 않았다. 주택가와 접해 있는 조용한 거리였다. 오래된 상가들이 얼마간 있을 뿐이었다.


“의외로 심심한 동네네.”


큰 기대를 하고 온 건 아니지만,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나는 이 거리에서 무엇을 보기 바랐던 걸까.


“그래도 길이 참 예뻐. 아담하고 고즈넉해.”


아내가 타이르듯 말했다.


“이만큼 걸었으면 됐어. 카페를 찾아 봐. 이왕이면 노천카페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소설 《잠》을 끝맺었다.


‘모두 푹 주무시고 멋진 꿈꾸세요.
-파리 라마르크 거리의 카페에서-’


베르베르가 머물던 곳, 소설을 쓰던 카페, 거닐던 거리⋯. 라마르크를 우리가 걷고 있었다. 이것이면 충분했다. 더 바랄 게 없었다. 가슴이 조금씩 벅차올랐다.

얼마쯤 걷자, 노천카페가 나왔다. 소담하고 시끄럽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그리던 대로의 카페였다. 점심시간이었지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조식을 워낙 든든하게 먹은 탓이었다. 나는 커피 한 잔이면 족했지만, 아내를 위해서 카푸치노와 샐러드,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어쩌면 베르베르가 여기에 앉아 소설을 썼을지 몰라.”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내가 말했다.


“그렇지! 몽마르트 근처니까, 화가들도 자주 드나들 거야.”


아내가 맞장구쳤다. 부드러운 카푸치노를 혀 위에서 굴리며, 소설, 책, 여행 에세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 여행을 제재로 에세이를 쓴다면 챕터 1의 제목으로 ‘응답하라, 진심으로!’가 어떨까?”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생각이 저편으로 달려 나갔다. 말이 제멋대로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뭐라고?”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아내가 물었다.


“여행 에세이를 써 보면 어떨까, 생각했어. 첫 번째 챕터 제목이 의식 저편에서 둥실 떠올라 버리는 거 있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책 제목도 아니고, 생뚱맞게 웬 챕터 이름?”


아내가 코웃음 쳤다. 인정하긴 싫지만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었다.


“뮤즈가 강림하셨나 보네.”


아내가 놀려댔다. 햇볕이 따사롭게 비추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었다. 이따금씩 행인이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심신이 이완됐다. 머리와 가슴이 어느 때보다 말랑말랑했다. 나른한 듯, 열에 들뜬 듯, 기분이 묘했다.

“하늘에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아. 코발트블루랑 징크화이트를 어떤 비율로 섞어야 저런 빛깔이 나올까?”


아내가 샐러드를 씹으며 혼잣말 했다.


“구름이 코끼리 뒷모습을 닮았어. 큰 구름은 엄마 코끼리, 그 옆에 작은 구름은 아기 코끼리 같아.”


뮤즈의 강림을 받은 건 내가 아니라 아내였다. 세상에나, 코끼리 뒷모습을 닮은 흰 구름이라니! 해괴망측한 구름이었다.


“지평선을 향해, 하늘바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코끼리 모자를 그릴 거야. 언젠가 반드시!”


아내가 결기 있게 말했다.


“재밌네. 뮤즈가 한 번씩 우리를 다녀갔어. 그러면 ‘코끼리여! 응답하라, 진심으로!’가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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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내면으로 빠져 들었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의 여행을 반추했고, 아내는 귀국 후에 그릴 그림을 구상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내가 여행 에세이를 가으내, 겨우내 내내 쓰게 될 줄을. 아내가 코끼리 그림을 그려 전시까지 할 줄을.


고즈넉한 라마르크. 뭔가를 생각하고 구상하기에 좋은 동네였다. 심심한 라마르크. 뮤즈와 더불어 공상하기에 맞춤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베르베르가 자주 찾나?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느꼈던 실망감은 온데간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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