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점심께였다. 우리는 음식점들을 품평하며 한동안 걸었다. 일단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음식점은 피하고 싶었다. 다음으로 실내가 너무 비좁아도 곤란했다. 입구에 계단이 있어도, 척 보기에 청결하지 못해도 안 됐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곳은 벨라 이탈리아라는 음식점이었다. 크게 붐비지 않았고, 실내가 꽤 넓었으며, 계단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게가 예뻤다(아내가 좋아했다). 나는 영국식 버거와 맥주를, 아내는 스파게티와 음료를 주문했다. 맛? 맛은 그냥 그랬다. 맥주와 음료가 차라리 요리보다 나았다.
“옥스퍼드 학생인가 봐. 엄마랑 밥 먹고 있어.”
아내가 소곤댔다.
“왜 그렇게 속삭여?”
“바로 옆 테이블이거든.”
“우리말을 알아들을까?”
“!”
대학가답게 학생들이 많았다. 가족 단위로 둘러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저들은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다. 딱 한 번, 저와 같던 때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의 2월경이었다.
“이런 데서 잘 지낼 수 있겠냐?”
초로의 아버지가 물었다. 물음이되,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얘가 애도 아니고⋯.”
서른 살이 다 된 누이가 말했다.
“어휴!”
아버지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난생 처음으로 돈가스라는 걸 입에 넣었다. 딱딱하고 맛이 썼다. 사람들은 이런 걸 왜 먹나 의아했다.
“이거 김치찌개 맞냐?”
숟가락을 도로 내려놓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김치랑 고기 있잖아요.”
누이가 털털하게 말을 받았다.
“무슨 맛이 이러냐? 난 못 먹겠다.”
“그냥 드세요. 학교 식당이 다 그렇지. 얘는 4년 내내 먹어야 된단 말이에요.”
“정말 잘 지낼 수 있겠냐?”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화가 난 듯도 했고, 착잡한 듯도 했다.
“당연하지. 문제없어!”
퍽퍽한 돈가스를 꿀꺽 삼키며 내가 말했다. 왠지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잘 지낼 수 있겠냐, 그날 아버지는 이 말을 버릇처럼 되뇄다. 아버지는 누이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지방에 홀로 남게 됐다. 대학 교정은 흰지팡이로 더듬어 다니기에 광야처럼 넓었고, 기숙사 방은 골짜기처럼 좁고 추웠다.
‘잘 지낼 수 있겠냐?’
아버지와 마주앉아 식사한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버지도, 나도, 누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 잘 지내고 있나?’
‘당연하지. 문제없어!’
나는 버릇처럼 자문자답하곤 했다.
“너도 그랬구나. 나도 비슷한 추억이 있어.”
아내가 말했다. 지난 일을 꺼내 놓는 동안 어느새 식사가 끝나 있었다. 목이 말랐다.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우리 부모님은 열악한 기숙사에 나를 두고 갈 수 없다고 난리쳤어. 그때 조교가⋯.”
거동이 불편한 딸을 기숙사에 떼어 놓고 가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감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초로의 아버지, 아내의 부모님, 옆 테이블의 어머니! 인종과 국적은 달라도, 그 마음만은 같을 것 같다.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말이다. 우리는 이 마음을 연료 삼아 한 평생을 살아가는 건지 모른다. 누군가의 삶이 밝게 빛난다면, 그리고 온기로 가득 차 있다면, 그는 영혼에 새겨진 내리사랑을 연소하며 살아가는 중일 게다.
‘이거 스파게티 맞니?’, ‘맞잖아요. 대충 드세요.’, ‘왜 이렇게 맛이 없니? 이런 거 먹고 잘 지낼 수 있겠냐?’, ‘아직도 내가 어린애인 줄 안다니깐⋯.’, 어쩌면 이런 대화가 옆 테이블에서 오갔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