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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Aug 30. 2020

옹골참에 대하여..

버팀의 미학

나는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소위 X세대이다. 흑백 텔레비전에서 칼라 텔레비전의 혁신을, 삐삐에서 휴대폰이라는 엄청난 변혁을 겪은 세대이며 코로나라는 전 세계적인 팬더믹의 세상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꼰대일 수 있으나 한때 반항의 아이콘이기도 했던 옹골찬 40대이다.

물론, 내가 드물게는 나라의 광복을 경험하고 6.25 동란이라는 전쟁을 헤쳐 나온 우리네 부모님 세대는 아니지만 그 못지않게 참으로 많은 굴곡의 역사를 살아온 이들이 바로 나와 같은 세대들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본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바뀌고 군부독재가 시작되었으며 광주에서는 이름 없는 희생들의 눈물이 뿌려지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기였던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고 그 당시 대학생들의 피나는 투쟁의 오랜 빛바랜 사진들이 아직도 마음을 울리는 모양새는 내가 그 시대 속에 함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의 가족을 둔 나의 어머니는 함부로 북에 계신 외삼촌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으며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늘 그런 아내를 둔 것에 대해 경계 아닌 경계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역사는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그 당시 국민학생) 나라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으며 아시아의 변방의 국가가 아닌 세계의 중심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88 올림픽은 나에게 전 세계라는 거대한 의미를 알게 해 주었으며 처음으로 해외에 대한 동경 또한 품게 해 주었다. 그렇게 시골에 조용히 묻혀 살던 조그마한 아이는 좀 더 큰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꿈을 꾸기 시작했다.


십 대가 된 나에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의미는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부모님들이 주도하던 전통가요와 대중문화를 이제는 우리 십 대들이 힙합과 락이라는 문화로 이어받았으며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아이돌 문화와 K-pop의 토대를 마련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단순한 아이돌이 아니었다. 그 당시를 살던 우리들의 표상이었으면 9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다. 아이돌 팬덤이란 것이 처음으로 등장했고 해외 유명가수들 또한 처음으로 접하기 시작했으며 그 뒤로 이어지는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에 우리모두는 열광하고 열광했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이 내한할 당시 처음으로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쳤고 평일이었던 공연 일정에 혹 학교를 무단결석하거나 수업 중 도망가는 아이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선생님들께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이성 간의 문제보다는 연예인에게 더 빠져들었고 장래희망 순위에 처음으로 연예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세대이다 보니 대학의 중요성은 더더욱 커졌으며 대기업과 공기업 혹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님들의 바람이 되었고 우리는 온갖 반항을 하면서도 또한 좋은 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하던 아이러니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가늠이 안 되는 X라는 말처럼 우리의 대학생활 역시 평탄치 못했다.

내가 대학 2년이던 시절 우리나라에는 IMF라는 엄청난 폭탄이 터져버렸다. 일자리가 줄고 회사들은 줄줄이 파산을 했으며 경제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을 쳤다. 당장 다음 학기가 불투명해졌으며 꿈조차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보장되는 확실한 미래는 없었다. 다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버티고 버틸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란 건 참 신기하게도 희망도, 미래도 없어 보였던 우리네 20대를 어찌어찌 끌고 앞으로 그리고 나쁘지만은 않는 어른들로 이끌어 왔다. 나라는 유래가 없는 성장세를 보이며 어느 정도 정상궤도를 찾았고 힘들게 버티던 20대들 또한 어느덧 30대가 되어 나름 각자의 자리들이 생겨났다.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난다는 말처럼 그 힘들던 시대를 겪으면서도 직장인으로서 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각자의 위치들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전 세계 종말이 올 거라는 음모론이 가득했던 1999년 12월 31일도 무사히 지나갔으며 나는 무려 20세기와 21세기를 모두 살아가고 있는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역시 세상의 유례가 없었던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라는, 앞으로도 없을 것인 세계적인 축제 속에 일본보다는 한국이 축제의 승자가 되었고 그 역사적인 붉은 악마 속에 나 또한 함께 했다.

지금까지도 소소한 냉전과 힘겨루기가 있지만 평생을 서로 총을 겨누고 살 줄 만 알았던 남북한의 정상들이 처음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았고 내 부모 또한 북의 가족들을 얼싸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당연히 나도 함께였다.

어린 시절 장국영과 유덕화에 환장했던 내가 어느새 비트의 정우성에게 환장하게 되었고 돈을 모으고 모아 극장가는 일이 영화 보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우리가 이젠 집에서 언제든지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손으로 직접 나라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리고 또한 촛불을 들고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어른들이 되었다. 아이였을 때 주현미의 트로트를 따라 불렀고 학생이 되자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불렀으며 성인이 되었을 땐 god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지금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따라 부르지는 못하지만 지금의 아이돌들의 노래가 낯설지 않은 것은 내가 이 모든 것들은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방송에서 싹쓰리의 '다시 여기 바닷가'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어쩌면 모든 일들은 버티고 버텨온 세대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90년 대생들이 몰려온다고 했을 때, 지금 나라의 주 생산층인 X세대들은 긴장 아닌 긴장들을 해야만 했다. 잘못하면 꼰대로 보일까 봐. 라떼라는 단어가 금기시되고 혹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요즘 젊은이들은 알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는 우리의 젊은 시절을 늘어놓을까 봐 노심초사하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점은 앞으로 2000년대생도, 2020년대 생도 계속해서 몰려올것이고 우리모두는 다시 한 번 같은 일들을 헤쳐나가리라는 믿음이 있다라는 점이다. 


나라의 이런저런 격변을 버티고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어려움들을 버텨왔으며 여전히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의 Z시대도 열심히 버티고 있는 중이다.

유재석과 이효리, 비의 싹스리를 보며 울컥하는 것은 저들이 나와 같은 세대이기도 하려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지금까지 수많은 일들을 겪고 버티고 잘 헤쳐 나왔음에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나이를 어느 정도 먹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할 수 있다고 아니 어쩌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서로에게 응원의 말을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았고 앞으로도 버티고 마음을 다스려야 할 일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지내온 사람들인 것을.. 먼저 태어나 먼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이들에게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곧게 닦아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어차피 세월은 아무리 막아도 흐르고 세대는 새로운 이름들로 바뀌어나갈 것이다. 그러니 다들 잘 버텨주기를.. X든 Y든 Z이든 간에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알파벳 26자가 완성되지 않듯이 역사란 그리고 삶이란 모든 이들의 버팀의 미학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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