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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Jul 07. 2021

바람 부는 집

딸이 대신 쓰는 엄마의 일기

이야기 셋

매년 아들 생일에 떡을 맞춘다. 아들의 생일이 국경일이라 까먹을 일도 없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매년 떡이라도 맞추어 여기저기 티를 내는 것이다. 시집간 딸년들도 이날만은 뭐라도 손에 들고 집에 들르는 날이니 어찌 보면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이지 않을까 싶다.

요즘 사람들이야 이런 나를 보면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들의 생일을 뭐 그리 거하게 하나 욕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딸들 또한 지들 생일은 안 챙기면서 아들 생일은 꼬박꼬박 챙기는 엄마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리하여 사위들 또한 내 앞에서는 아니지만 아내들에게 장모의 이런 모습을 의아해한다나 뭐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어린 나이에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 생전 겪어보지도 못했던 온갖 고생을 하며 신혼생활을 했더랬다. 집안에 전기가 끊기기 일쑤고 줄줄이 딸린 남편의 동생들과 시부모님까지 결혼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았었다. 그나마 신랑 하나는 순하고 착해서 그거 하나 보고 참으며 지냈다. 어려운 형편에 아이를 키우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 뭐 대단한 종갓집이라고 시부모는 장남이니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결혼 초부터 닦달들을 하셨다. 그러나 인생사 어디 그렇게 원하는 일들이 일어날까?  첫딸을 낳고는 그리 시부모의 시집살이가 심하지는 않았건만 그 이후로도 딸만 내리 넷을 낳고 보니 구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밥그릇 달랑 두 개 들고 본가에서 쫓겨나 셋방살이를 시작한 일이 오히려 마음은 편했으니 그때 내 삶이 얼마나 고되었던지 지금 돌이켜 보면 나 스스로가 안타깝고 가여웠고 또 그 힘든 시절을 버티고 버텨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대견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무려 여섯째 막내로 말이다. 


그날은 현충일이었다. 그 당시 워낙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병원에 가는 건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집에서 산파를 불러다가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남편은 공무원이라 마침 그날 당직이었는데 하필이며 그렇게 신랑도 없이 집에서 지금까지의 서러움과 구박을 끝내줄 아들을 낳게 된 것이었다. 

가끔 딸아이가 물어본다. "엄마, 정말 동생 생일이 현충일이 맞는 거야? 그냥 6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아들이니까 모두 기억하게 하려고 현충일로 출생 신고한 거 아냐?"

아무렴 귀하디 귀한 아들이라고 태어난 날을 조작할까. 

그날 아들을 낳고 남편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그 당시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옆집 사람들이 동사무소로 전화를 걸어 아들 탄생의 소식을 알리게 되었고 딸들만 있던 남편의 고충을 모든 동료들도 알고 있었기에 동 전체 아니, 시 전체가 경사 아닌 경사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밖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남편에게 동네 확성기로 소식을 전하기에 이르게 된다.

"사무장님! 사모님이 아들 낳으셨데요. 얼른 집에 가보세요. 고생 끝나셨네요" 



알아주는 사람도 있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 시집 안 간 딸년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매년 현충일이 되면 떡값을 대신 내주기도 하고 거하게 생일상을 차려주기도 한다. 시집간 딸들 역시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케이크를 들고 오던 과일박스를 들고 오던 그날은 꼬박 챙기는 편이다. 심지어 손녀 손자도 삼촌 생일은 매년 까먹지 않고 챙기고 있다.

남아선호 사상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남녀 차별이 어디 있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아들의 생일은 그저 딸과 다른 아들,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너무나 고생스럽고 힘들었던 시절의 크나큰 행복이었고 내 힘의 일부였다. 시동생이 결혼한 후 나보다 먼저 아들을 낳았기에, 지금이라면 그게 뭐 그리 큰 문제이겠냐만은 동생이 먼저 아들을 보니 남편마저 그 허무함이 이루 말할 수 없던 시절이었으며 시댁 어른들의 미움이 나를 넘어서 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던 시절, 많이 늦었지만 그리고 나이도 한참 들어 낳은 아들이었지만 그 아들이 그간의 모든 서러움을 덜어내어 주었음이 분명했기에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겐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적은 월급으로 그 많은 식구들이 힘들게 버티며 살았기에 그 귀한 아들이 잘 못 먹을까, 아프지 않을까, 키가 작으면 어쩌나, 온갖 걱정을 하며 키우다 보니 생일날만이라도 누구보다 거하게 그리고 모두가 축하해주는 그런 날로 만들어 주고자 어느 자식보다 더 챙기게 되었고 그 생일은 아들이 장성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알아줘도 그만이고 못 알아줘도 그만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매년 어김없이 현충일은 돌아오니 나는 그날이 되면 미리 떡을 맞추고 생일상 또한 거하게 차릴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고 위대한 훈장이고 행복이니 누가 뭐라든 나 스스로에게 주는 고생의 대가이자 위안이며 스스로의 잔칫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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