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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 Jul 21. 2021

바람 부는 집

딸이 대신 쓰는 엄마의 일기

이야기 넷


"옛날 어르신들은 늘 하루를 술로 마감하곤 했지. 그날도 어김없이 동네 어르신 한 분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한밤중에 길을 걸어가고 계셨데. 동네 어귀가 가까워지고 동네로 이어지는 산아래 계곡 물소리가 졸졸 들려오고, 무심코 고개를 돌려서 물가를 내려다보는데, 하얀 한복을 입고 윤이 흐르는 까만 머리에 곱게 쪽을 진 여자가 그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 어르신 눈에 들어온 거야. 사방이 깜깜한 그곳에, 달빛만이 길을 비추고 있는 곳에서 말이지. 그 어르신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여자가 있는 물가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어. 마침내 그 여자 가까운 곳에 도달한 어르신이 뒤에서 조용히 여자분을 불렀어.

'이봐요, 부인! 이 밤중에 왜 여기서 빨래를 하는 거요?'

'..................'

'아니,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니까?'

마침내 , 그 여자가 조용히 고개를 뒤로 돌렸어. 그리고 어르신은 여자의 모습에 정신을 잃고 물에 빠지고 말았어."

"왜? 엄마. 무슨 일이 있었는데?"

"여자가 어르신의 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돌렸는데, 바로바로 뒤로 돌린 앞 얼굴도 마찬가지로 까만 쪽을 진 모습이었어."

"꺄아악!"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여름이 되면 밤마다 식구들이 툇마루에 모여 수박도 쪼개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더운 열대야를 이겨내곤 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텔레비전에선 전설의 고향을 방영했었고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서워하면서도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나 귀신이 궁금해 미치겠는 표정들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옹기종기 모여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갈 듯 몰입들을 했었다.

밤 10시가 넘어 전설의 고향도 끝나고 이제 다들 자야 할 시간이 되어도 여운이 남아있는 아이들은 잘 생각은 조금도 없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곤 했다.

지금처럼 에어컨이 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더위를 피할 길은 냉수 샤워나 선풍기가 전부였던 시절이었기에, 그나마 선풍기도 방마다 다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아이들은 마당 툇마루에 모기장을 치고는 그 안에서 잠을 자곤 했었다. 까만 하늘에 별들이 초롱초롱했던 그 밤들이 어디 그리 쉬이 잠이 들 수 있었겠는가. 아이들은 이내 나를 붙들고는 무서운 이야기를 더 해달라며 조르곤 했었다. 그럼 난 또 내 어린 시절 내 아이들처럼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들었었던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곤 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막내 아이까지 조금 더 커지고 나니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여름밤에 무서운 이야기를 위해 나에게 달려오지 않게 되었다. 각 방마다 에어컨은 아니더라도 선풍기들이 하나씩은 설치가 되었고, 이제 전설의 고향 대신 괴물들이 나오는 온갖 드라마며 영화들을 알아서 챙겨보며 아이들은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성장해 갔다.

조막만 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 잠들지 못하는 더운 여름밤에 나를 붙잡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 달라며 조를 때는 여간 귀찮고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보따리도 아니고 어디 매일 이야기들을 내어 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다 보니 옆집에 살고 있던 동생네까지 불러 옥수수며 수박을 먹으면서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그런데,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건 그 여름밤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고 어느 순간이 되면 더 이상 나에게 이야기를 해달라 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그리고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들은 이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밖을 잘 나가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도 다니고 대중목욕탕도 다니곤 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내 또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그럴 때마다 딸아이가 푸념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엄마는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하고 그렇게 오래 얘기를 해? 남들이 보면 원래 알던 사이인 줄 알겠네. 아니, 왜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지는 거지? 얘기를 시작하면 끝이 안나"

'그런가? 내가 그렇게 오래 얘기를 했나?'

어릴 적부터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게 처음이던 아니든 간에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되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러한 모습이 해야 될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이제 아이들은 다 자라서 집에 있는 시간보다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고 원래 말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어린아이들이 밤마다 이야기를 내놓으라며 졸라대는 통에 없던 이야기도 지어내는 사람으로 바뀌어버린 건 아닌지. 게다가 다 커버린 아이들은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얘기를 원하지 않으니 쌓이고 쌓인 나의 이야기들이 나와 같은 이들을 만나 봇물 터지듯 터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식들도 더 나이가 들어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나이가 들어 말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자식들을 위해 온갖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무더운 여름밤을 잘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이야기를 더 이상 들려줄 수 없기에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게 되었다는 것을, 아이들도 언젠간 부모가 되고 할머니가 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들이 차고 넘쳐 수다스러워진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오겠지. 그렇게 우리의 삶이, 세월이 흘러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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