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미순 지음
간병과 돌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는 이들의 벼랑 끝 선택.
진창과 폐허에서도 한 줌 빛을 찾아내는 희망의 기술
그해 크리스마스 아침 날 엄마는 어제저녁에 입었던잠옷 그대로 119 응급차에 실려 아산 충무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엄마가 누었던 자리에는 내가 입을 짧은 티셔츠가 있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옷을 다음날 나에게 입히기 위해 엄마는 밤새 넓은 등으로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엠블란스 뒤를 쫓으며 나는 검은 동채가 사라진 희번덕거리는 엄마의 눈을 계속 생각했다.
그 후 엄마는 왼쪽 머리를 잃고 세상의 모든 것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있는지,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침묵들이 이어졌고 나는 늦잠을 잔 성탄절의 아침을 저주했다.
엄마의 소식을 들은 동생네들이 급히 아산으로 내려오고 우리는 하루에 두 번씩 중환자실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진 엄마를 깨우기 위해 옥돌로 만든 지압기로 엄마의 발바닥을 문질렀다. 여동생은 엄마가 좋아했던 성인가요를 낮게 들려주었고 남동생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엄마의 팔과 다리를 주물렸다.
다행히 중환자 절반이 장례식장으로 간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뒤로 하고 엄마는 일반 병실로 옮겼다. 그것이 불행 중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이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는지 그때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하지도 먹지도 못하고 스스로 배설하지 못하는 엄마의 몸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제 곧 50의 나이를 바라보는 이혼녀 명주와 스물여섯 살의 준성도 각자 치매 걸린 어머니와 뇌졸증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백화점 점원과 보험회사 콜센터 직원을 거처 단체급식 공장에서 발바닥 화상을 입고 어머니와 함께 살던 명주. 낮에는 아버지의 재활 운동을 돕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를 해결했던 준성. 간병과 돌봄의 독박을 찬 이들의 삶은 불안과 위험의 연속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어 완전 고립된 인물들의 돌봄은 고통 그 자체이다.
문미순의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이다.
점점 그들의 일상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돌봄의 무한반복에 무너져 내렸고 수시로 불행은 닥쳤다. 스물여섯 살 준성은 이렇게 탄식한다.
착하다는 말, 대견하다는 말, 효자라는 말도 다 싫어요 그냥 단지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힌 돌봄과 간병은 그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저 개인의 책임이었고 도덕적 의무였다. 국가도 사회도 그들에게는 무의미한껍데기에 불과했다. 마침내 그들에게 도덕적 궤멸이일어났다. 명주는 갑자기 사망한 어머니의 시체를 미라로 만든 후 관에 넣어 작은방에 은닉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연금으로 생활을 한다. 불법과 불효를 일삼고 태연히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그녀의 행동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역지사지의 관점에서는 그녀를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명주는 현실과 패륜의 경계에서 갈등하며 나지막하게 자신에 대해 말한다.
고작 이런 것들을 먹자고 이것들을 먹고 몇 날이라도 더 살자고 엄마를 미라로 만들어놓고 연금을 쓰고 있구나 생각하니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은 죽은 엄마가 흙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게 만든 패륜아라고 자책한다.
시체를 둘러싼 아슬아슬한 공방이 쫄깃쫄깃하게 이어지고 범죄 영화를 보는 듯 스릴감이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모호함이 없이 이야기는 명쾌하고 분명하여 쉽게 쉽게 이해된다. 명주의 범죄는 가난 앞에 도덕과 윤리의식이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고용에서 소외된 사람이 간병과 돌봄 비용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이 역시 자본의 힘이 뒷받침 돼야 한다. 그런데 이 범죄가 스물여섯 살의 준성에게 연쇄적으로 확장되며 이들에게 닥친 돌봄의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한다.
준성의 아버지마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명주는 준성의 생존과 꿈을 위해 현실적이며 악마적인 제안을한다. 자신처럼 시체를 은닉하고 연금으로 생존하자고 말이다. 그러나 죄책감에 고민하는 준성에게 그녀는 말한다.
간병은 그 끝이 너무나 허무하고 너의 젊음을 앗아갈 뿐 아니라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수도 있다고…….이건 세상이 내게 준 모욕과 멸시에 대한 보상이야
그들은 왜 살뜰한 돌봄에서 보여준 희생적인 효의 본체가 무너지고 말았을까? 그것은 장기적인 돌봄과 간병이야말로 개인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노인 간병과 돌봄은 개인의 영역에서 무한 책임질 수 없는 공공의 영역이며 국가와 사회에서 일정정도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은 사회 안전망 밖에서 휘청거리며 불안한 삶을 살았다.
나라가 못 해주니 우리라도 하는 거지. 살아서 끝까지 살아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하는지 보자고. 그때까진 법이고 나발이고 없는거야) 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명주의 일갈은 독자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그들이 살아가야 할 용기를 얻고 희망을 품게 된 것은 서로 간에 느끼는 동병상련이라는 동질감과연대감 때문이다. 거기에 이웃의 작은 관심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게 한다.
작가 문미순은 다소 무겁고 어두운 사회적인 문제점을 경쾌한 스텝으로 춤을 추는 무희처럼 빠르고 신나게 구슬리며 독자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결코 불행과 절망의 시선으로 무너진 사회를 바라보지 않는다. 마침내 겨울 눈이 오는 날 트럭 짐칸에 두 개의 관을 싣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에게 운수 좋은 날들이 이어질지. 작은 희망을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