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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그 치명적인 매력의 도시

- 고색창연한 옛 도시에서 길을 잃었다

하노이 3일째.

이제 중구난방으로 뚫려 있는 복잡한 도로도 낯설지 않다. 낯설었던 잠자리마저 최고의 스위트 룸이 되었다.

아침을 같이 먹는 낯익은 여행자들도 친구처럼 느껴진다.

출입문을 열어주는 호텔 벨 보이의 눈웃음도 정겹고 다정스럽다.

전날 야시장에서 구입한  페도라 중절모자를 눌러 쓰고 싸구려 카메라를 목에 건 채 호텔 문을 나섰다.

여전히 큰북을 울리는 듯한 오토바이들의 행렬이 사방팔방으로 질주한다.


그 도시의 소란스러움이 여행자의 익숙함이 되었을 때
여행의 즐거움이 생기는 법이다.


이제 제법 이리저리 오토바이를 피하며 능숙하게 도로를 건넜다. 마치 물 밑 송사리 떼들이 한 치의 충돌과 이탈도 없이 급변을 거듭하는 것처럼 오토바이의 행렬은 너무나 질서 정연했다. 고함과 경적 소리도 없이 이동 방향과 속도에 맞춰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교통경찰이 없이도 그들 스스로 무언의 규약을 지키며 도시의 질서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제 호텔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 밤늦게까지 여행자들과 하노이 시민들이 줄지어 서 있던 쌀국수집이 보이고 옹기종기 모여 있던 작은 카페들도 아침 햇살 속에 빛나고 있었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들 앞에 오토바이와 자전거, 사람들이 뒤엉켜 있고 거미줄 같은 전기선은 공중에서 높고 낮은 포복을 하고 있었으며 난간에 매달린 빨래와 화분들이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벌써 몇 걸음을 걷지도 않았는데 온 몸이 달아오르고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모든 풍경은 새롭고 흥미진진한 대상들이다. 어쩌면 이 생애 마지막 풍경일 수도 있다.


몇 발자국을 벗어 나자 이내 하노이 시장통이 보였다. 짙은 푸른색의 열대 과일을 두고 흥정을 하는 장사꾼과 할머니. 그녀의 손가락에서 타고 있는 담배는 무척 뜨거워 보였다. 어쩐지 모두들 인도 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아침나절부터 음식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어떤 여인은 논라를 쓴 채 쭈그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자전거 짐받이에 꽃을 가득 실은 여인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옷 가게 안의 젊은 판매원들은 바닥에 퍼질고 앉아 스마트 폰에 빠져 있다. 그들은  당최 장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직 아침인지라 많은 손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온 몸을 오토바이 위에 걸치고 신기에 가까운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잠들고 있는 중년의 사내도 보였며  길거리 이발소는 때 마침 손님을 맞아 분주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노이 시장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 웃고 떠들거나 달콤한 잠 속에 빠져 있다




이젠 호암끼엠 호수도 낯설지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생활해 온 사람처럼 주저함 없이 여기저기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한 남자가 나를 불렀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연이어 나를 부르는 애틋한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로 갔다.

'왜 불러'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헝겊을 쥔 오른손을 내밀면서 "너 신발 더러워 좀 닦아"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단호하게 돌아서서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호수 주변으로 갔다.

씨클로들은 어슬렁거리고 가인항을 맨 여인은 힘겹게 도로를 건너고 있었다. 도미노 피자가게와 버커킹 간판도 보였다. 관광버스들은 쉴 새 없이 호수 주변을 들락나락거렸고 하노이 시내 투어용 이층 버스는 이미 중국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이는 아버지. 가만히 나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녀.

꽃밭 근처 벤치에서 남녀 한쌍은 피리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청아하여 호수 주변에 널리 널리 퍼졌다.

하노이 시민과 여행자들의 쉼터, 호안끼엠 호수


굵고 높은 고목들은 부채꼴 모양으로 하늘 가득히 퍼져 푸른 그림자를 지상으로 내려놓았다.

그 아래 여행자들과 시민들은 나무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젊은 연인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 대부분 여행자들은 야외 커피숍 파라솔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며 하노이 시민들은 큰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구글맵을 따라 오페라 하우스를 찾아 나섰다. 여전히 씨클로 운전수들은 계속 따라다니며 손가락 두 개를 내밀며 내게 흥정을 부쳐 왔다. 프랑스풍의 옛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걷고 있으니 마치 아득한 시대로 되돌아 간 듯하였다.

이윽고 길 건너편에 1911년에 건축된 바로크 양식의 오페라가 나타났다. 붉은 베트남 국기가 지붕 위에서 휘날리고 네 개의 볼록한 푸른 돔이 보였다.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 가니어가 프랑스의 오페라 하우스를 모방하여 만든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연한 노란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한국의 k-팝과 국악이 이곳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하우스 내부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공연 티켓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입장 자체가 불가했다.

오페라 하우스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 전쟁 박물관이 나왔다.

나는 잠시 전쟁 박물관에 들러 잠깐 더위를 피하기로 했다.

위대한 인도차이나 전쟁의 역사를 탐방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도무지 무더운 날씨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다행히 입장권도 받지 않았다.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선풍기가 있는 소파에 앉아 잠깐 쉬려고 했지만 점심시간인 12시가 되자마자 칼같이 안내원들이 방문객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니 그만들 가슈'라는 표정을 지으며 냉정하게 현관문을 닫아 버렸다.

이내 밖으로 나오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압박했다. 바지가 철갑을 두른 것처럼 무거웠다. 발바닥과 발등은 뜨거웠다. 어디로 달리 피할 곳도 없었다. 한낮의 정오.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다.



마침 담벼락 주변에 씨클로 운전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맨 앞에 있는 운전수에게 롱비엔 다리로 가자고 했다.

그곳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마 전날 하롱베이로 갈 때 미니 밴에서 바라 본 녹슨 다리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914년 프랑스의 에펠에 의해 건설된 롱비엔 다리는 다섯 차례에 걸친 미군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결코 제국주의자들에게 패배하지 않은 베트남 민족의 강인한 정신을 엿보는 것 같았다. 나는 씨클로 앞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꼭 한 번 타 보고 싶은 씨클로였지만 왠지 마음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남의 고역으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이내 씨클로는 가볍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전방에서 바라보는 하노이의 풍경은 파노라마 영화를 보는 듯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밀려가고 밀려오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씨클로는 도로를 질주했다.

그리고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져 내렸다.

늘그수레한 운전수는 롱비엔 다리 교각 근처에서 나를 내려놓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폭염의 도로 속으로 사라졌다.

장장 2킬로 미터에 달하는 롱비엔 다리, 쉴새 없이 오토바이들이 질주한다


나는 주섬주섬 다리 주변을 서성거리며 강변 방향으로 들어서자 심한 악취와 함께 시장통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방향을 잃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꼬마 한 녀석이 담벼락에 껑충 올라서더니 다리 위쪽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나도 냉큼 꼬마 녀석을 따라 올라서서 고개를 내밀자 아찔하게도 굵은 쇠 덩어리로 만든 철로가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고개를 내밀었다면 기차 바퀴에 부딪혀 즉사하기 딱 알맞았다.

 

나는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빔자형 철근 덩어리 사이로 고개를 넣고 전후 좌우를 살핀 후 이두박근과 어깨에 잔뜻 힘을 주고 냉큼 올라섰다. 다행히 철로 바로 옆에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한 인도가 있었다.


그때 롱비엔 다리를 건너고 있던 금발의 연인들이 나를 보더니 엄지 척하며 놀라움의 미소를 보냈다.

꼬마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난데없이 오토바이들이 쏜살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다리의 중앙 부분은 철로가 놓여 있고 좌우 양측에는 오토바이들이 다닐 수 있도록 2미터 폭의 도로가 았었다. 그리고 다리 난간 쪽으로 겨우 한 사람 정도 다닐 수 있는 인도가 있었다.

온통 녹슨  철골들이 허물 허물 녹아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고 오토바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간간히 철근에 붙어 있던  콘크리이트 상판이 흔들렸다.

롱비엔 다리에서 바라본 하노이 시가


걸을 때마다 붕괴와 추락의 공포를 느꼈다. 다리 밑은 폐선 몇 척과 초록빛의 나무와 풀들이 남색의 물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강 중앙에는 황토색의 강물이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리 중간쯤 갔을 때 더 이상 다리를 건너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다시 돌아갈 생각 하니 까마득했다.

그때 녹색 재킷을 입은 오토바이 하나가 쏜살같이 내게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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