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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와 추위,만리장성에서 길을 잃다

- 중국 북경 방문기(사진 출처: 블로그)

역시 바깥 복도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웃음에는 국적이 없다. 



숙소는 저렴한 반면 외부 소음을 차단하기에는 너무 열악하다. 나는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8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오늘은 일찍 나서야만 정해진 여정을 소화할 수 있다. 만리장성은 북경에서 1시간 거리에 있다. 가장 베이징에서 가까운 장성은 팔달령에 있다. 그곳은 전철 혹은 인력거가 닿지 않은 곳이다. 북경 바깥으로 나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낯선 지역에서 버스 정류장을 찾아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안내 책자에는 덕승문 근처에 877번 버스를 타면 된다고 돼 있다.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전날 저녁 사다 놓은 슈퍼마켓 빵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약간 걸쭉한 주스도 한 잔 한다.

다시 넓은 도로로 나오자 아침 출근에 바쁜 직장인들이 쉴 새 없이 골목길에서 쏟아져 나온다. 

차와 사람이 엉켜 복잡하고 소란스럽다. 다시 전철을 타고 지수이탄역에 내렸다.



안내 책자에는 A출입구로 나와 버스 반대방향으로 쭉 걸어 올라가면 버스 정류장이 여러 개가 나오는데 제일 마지막 정류장이 팔달령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나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스모그 천지였던 시내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도로를 젖시고 낯선 이방인의 머리와 어깨에 부드럽게 내린다. 사람 사는 곳이 비슷하듯 이곳도 마찬가지이다.

도로에는 자동차와 버스가 달리고 인도에는 사람들이 바삐 걷고 있다. 도로변에 즐비한 가게들은 문을 열고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 나는 계속 걸었다. 이렇게 관광지가 아닌 일반 도로를 오랫동안 걷기란 북경에서 처음이다. 

낯선 곳을 걷는 것은 즐겁다. 비롯 목적지를 찾아가기까지 혼란과 혼동이 난무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낯선 자신을 만나고 낯선 타인을 만난다. 새로움이란 낯섦에서 온다.


그러나 이상하게 걸으면 걸을수록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때쯤이면 팔달령 가는 877번 버스가 나타나야 되지만 좀처럼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벌써 다리는 아프고 몸은 지쳐간다. 오늘 만리장성 일정은 포기해야 하나라는 패배감마저 들었다. 나는 일단 근처 가게에 들러 주스 한 병을 샀다. 가게는 냉장이 되지 않는지 주스물은 텁텁하다. 몸속에 피로 해복제인 당을 채우고 어떻게 할까라며 생각에 빠졌다.


그 순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위치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럴 때 무제한 해외 데이터는 도움이 된다. 검색 결과 나는 877번이 있는 버스 정류장과 정반대 방향에 서 있었다.

구글 맵을 작동 하자 반가운 한국 여성의 목소리가 안내를 시작한다. 나는 다시 걸어온 길을 따라 다시 되돌아갔다. 지난번 새벽 골목길에서 고생바가지를 시킨 구글 맵이었지만 별 수 없이 이놈을 다시 믿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구글 맵은 나를 정확한 위치로 안내했다. 물론 나는 30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이 동네도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내 중심에서 그렇게 먼 지역은 아닌 듯 현대식 아파트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는 군인식 제복을 입은 관리자가 무섭게 서 있다. 아파트를 지나자 작은 하천이 나오고 전방 10미터쯤에 덕승문이 보였다. 동시에 만리장성도 보이는 듯했다.



비 내리는 북경 거리와 만리장성의 출발점인 덕승문 근처 정류장


하천 다리를 지나자 마침 877번 버스가 보였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냉큼 'go to 만리장성'이라고 하자 안내자인 듯한 여자가 'ok'라고 한다. 나는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많은 여행객들이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어느 초로의 아저씨 옆에 살포시 앉았다. 역시 중국 버스는 만땅이 돼야만 출발하는 듯했다.

나는 앉자마자 배고픔도 달래고 무료함도 달랠 겸 빵을 먹기 시작했다. 아침 숙소에서 나올 때 가방에 챙겨 온 것인데 이때 요긴하게 쓰였다. 그리고 주스도 쭈욱 빨아먹었다. 버스 안은 대부분 중국 사람인 듯 왁자지껄했다. 이제 제법 적응이 된 듯 그렇게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근데 대부분이 단체 관광객인 듯 한 중년의 아줌마가 안내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전혀 알 수 없는 내용. 그러나 나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들의 일원이 아니니깐.

대략 10분쯤 기다리자 버스는 출발을 했다. 도로로 나오자 점차 빌딩은 사라지고 낮은 산과 들판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그때 한바탕 일장 연설을 마친 안내 아줌마는 대뜸 내게 왔어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말한다.

나는 당황스럽게 노..노..라고 버벅거리며 대꾸했다. 아줌마는 전혀 화장을 하지 않은 민낯이었고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와 입술을 가졌다. 


며칠 동안 북경 거리에서 만난 여인들은 대부분 화장을 하지 않은 편이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거리에서 화장한 여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민낯이 자연스럽게 순박한 맛도 있지만 지나친 민낯은 공포감을 주기도 한다. 


이 안내 아줌마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낯선 사람에게 뭔가 도움을 줄려고 말을 건넨 듯하였다. 아무 일행도 없이 혼자 뻔뻔스럽게 앉아 있는 모양새가 다소 불쌍해 보였는지.

이렇게 버스는 대략 50분 정도를 달렸다. 좁은 산길로 들어서자 산등성이마다 닭 벼슬 같은 돌담들이 산과 골짜기를 넘고 있었다. 

이윽고 팔달령 도착.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골짜기에서 매복한 찬 바람이 일시에 달려든다. 다소 쌀쌀하고 추운 날씨이다. 거기에 낮게 냉기를 먹은 안개가 흐르고 있다.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몇 개의 가게뿐이다. 다소 썰렁하다.

팔달령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자칫 잘못했으면 단체 관광객들을 따라 입구의 정반대 방향으로 갈 뿐 했다. 제 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산골짜기에서 국제적인 미아가 되기 쉽다.         

만리장성 입구


다시 찬찬히 주위를 살피자 이정표가 보인다.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가자 경사진 원통형 터널이 보인다.

좌우 주변으로 각종 기념품과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다. 팍팍한 터널을 통과하자 이번에는 드넓은 광장이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나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샀다. 100위안을 받자마자 위폐를 감별하려는 듯 불빛에 비쳐보고 손끝으로 매만져 본다. 낡고 심하게 구겨진 1위안 지폐가 내게 되돌아온다.



드디어 만리장성을 오른다.  그런데 장성 일대는 북경에서 따라온 안개 일색이다.

도무지 앞뒤 좌우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낮은 장성 입구에는 전방만 약간 보일 뿐 조금씩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사진으로 보아온 그 웅장하고 화려한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여기가 만리장성이란 말인가. 혹시 버스가 다른 지역으로 데려와서 사기 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은 든다. 


더구나 이 와중에 버스에서 먹은 빵과 음료수 때문인지 살살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이다. 특히 여기서 화장실을 찾게 된다면 이는 악몽이다. 갑자기 도쿄타워를 찾아가던 그 동경의 악몽이 생각났다. 나는 애써 아랫배를 달래며 한 걸음 한 걸음 장성의 계단을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성곽의 폭은 대략 2미터 정도, 계단은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다소 울퉁불퉁하고 물렁물렁한 고무를 밟는 듯한 느낌이다.

그림 좋은 만리장성을 기대했지만 온통 안개와  수많은 인파 뿐, 장성은 그야 말로 오리무중 (사진 출처: 블로그)


급경사 지역은 손잡이를 설치하여 안전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다.  성곽은 견고하고 한없이 이어져 있다. 


마치 배암이 안개를 헤치고 산등성을 기어가듯 장성은 뱀들의 꿈틀거림 그 자체이다. 인간의 위대한 역사를 생각하기 앞서 한 군주의 명령으로 공포를 떨며 폭력과 착취 속에서 장성을 축조했다고 생각하니 백성의 피고름이 맺혀 있는 듯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안개와 추위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성곽을 오른다. 

더러는 난간에 기대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연인들은 손을 잡고 가족단위는 어린아이를 앞장 세우며 마냥 웃으며 장성을 걷는다.

무심히 벽돌을 보니 표면마다 한자 혹은 영어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명색이 세계 문화유산인데 야만인 마냥 부끄러운 짓거리를 해 놓았다. 다행히 한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는 급해지고 바람은 심해지고 안개는 짙다.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장성은 중간에 끊어져 있고 안개는 바다처럼 흐르고 있다.

안개 속의 만리장성,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밟고 싶어도 밟고 싶은 만리장성


더 이상 오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때 마침내 우려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배가 급작스럽게 아파지면서 괄약근에 현저하게 힘을 줘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행히 근처 성곽 아래에 화장실이 보였다. 

나는 엉거주첨한 자세로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가까스로 화장실에 도착했지만 휴지가 없지 않은가. 

휴지를 사기 위해 매점까지 갈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다.

화장실 입구에 있는 청소 담당자에게 '페이퍼'라고 말하자 '노 페이퍼'라는 답이 돌아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 

참고 열나게 뛰어내려가야 되는가.

나는 휴지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지폐와 동전. 그리고 손수건. 이제 더 이상 손수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항상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아 바깥에 나오면 가끔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 

그때 동경타워를 찾아갈 때 지공원에서 만난 낭패감이란.

나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왔다. 어렵게 찾아온 만리장성. 참으로 만감이 교차되는 장소이다. 안개로 인해 장성의 웅장함을 느낄 수 없었고 배탈 설사로 인해 아픈 추억만 남기고 말았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만리장성은 저 멀리 만리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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