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조금 무책임해져도 될까요?

by 집필앤하이드

고양이를 키운 이후로 동물 병원만 4~5곳을 갔다.


한 곳은 집 앞에서 가장 가깝고, 버스에서 오며 가며 눈여겨봤던 병원이었다. 이름도 수의사가 진정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에 차린 병원처럼 정감 있었다. 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오자마자 갔던 병원이었는데, 이름과는 조금 거리감 있는 피로가 잔뜩 쌓인 심드렁한 수의사를 보고 조금 실망해 필수적인 예방접종을 맞히고 나선 다시 가지 않았다.


두 번째 동물 병원도 우리 집 근처에 있는 곳이었는데, 첫 번째 그곳보다 규모가 작았다. 수의사는 나름 수의학계에 저명한 인물인지 이런저런 학회를 다니느라 바빠 보였다. 하지만 내가 만난 수의사 중 가장 공감능력이 큰 사람이었다. 한 번은 고양이가 ‘츄르’ 먹고 설사를 해서 고생했던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고양이한테 필요한 영양분은 사실 사료에 다 있어요. 굳이 간식 안 줘도 돼요. 저희 집 고양이도 일절 간식 먹이지 않는데 무척 건강해요. 그리고 만약 께름칙하면 보호자분이 한번 고양이 간식도 먹어봐요. 은근히 간이 있어서 고양이한테는 자극이 될 수 있어요”라고 초보집사인 나에게 자상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고등어 무늬를 가진 고양이들의 특징도 알려줬는데, 이전에 병원을 찾은 보호자가 고양이와 장난치다가 손톱에 눈알이 찍히는 바람에 근처 응급실에 갔던 얘기를 해주며, 장난기가 심하니 조심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세 번째 동물 병원은 지인 소개로 갔던 곳인데, 중성화 수술을 했다. 아무래도 고양이의 첫 수술인 만큼 그래도 검증된 곳에서 하고 싶은 마음에 가격을 더 주더라도 괜찮은 곳에 가고 싶었다. 무난하게 수술은 마쳤지만 집에서 거리가 있는 탓에 자주 가지는 못했다.


네 번째 동물 병원은 남편과 결혼 후에 다니는 곳으로, 현재 거주지에서 평이 꽤 괜찮은 병원이다. 고양이가 3살쯤 됐을 무렵이었고, 규칙적인 식습관과 배변활동도 잘하고 있었던 터라 고양이 건강은 안정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마치 본인에게 관심을 거두지 말라는 듯 한 번씩 나를 애잔하게 만든다. 어느 날 고양이 얼굴을 쓰다듬는데 한쪽 볼에 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평소에 양볼이 가려운지 자주 긁고 다니는데, 세게 긁다가 날카로운 것에 상처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고양이의 피를 처음으로 본 나는 화들짝 놀랐고, 당장 병원을 예약해 갔다.


“곰팡이균 같은 건데요, 이유는 사실 알 수가 없어요. 약만 잘 먹이고, 연고 발라주면 금방 낫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쪽에는 털이 잘 안 날 수도 있어요”


나는 동물 병원에만 가면 죄인이 된다. 유난히 예민한 동물인 고양이를 바쁜 일상을 핑계삼아 소홀해져서 고양이의 건강을 놓치는 건 아닌지 자책하게 된다. 고양이가 설사해도, 시도 때도 없이 몸을 꿈틀대는 ‘과민성 신경 증후군’ 증상이 있을 때도, 볼에 피부병이 났을 때도, 평균 이상의 체중을 가졌다고 할 때도.. 모두가 내 탓인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게 일견 맞기도 하다. 사실 그럴 때 나의 죄책감을 더하는 수의사도 있고, 덜어주는 수의사도 있다.

네 번째 병원은 후자에 속했다.


“보호자분이 아무리 관리를 잘해줘도 치아 염증 생기는 애들은 생기고요, 온갖 좋은 것을 먹인다고 해도 아픈 애들은 아프더라고요. 그건 어쩔 수가 없어요. 다만 보호자님들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돌보는 게 중요한 거죠.”



전문가가 하는 말 치고는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보호자인 내가 듣기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기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예전에 내 몸에 이상이 와 동네 산부인과를 간적이 있다. 아무래도 결과가 심상치 않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며 소견서까지 써줬다. 그 의사는 걱정스럽게 나를 보며 “이게 맞다면, 정말 나이 든 사람한테만 걸리는 병이에요. 아직 젊은 분인데 어쩌다가…”라고 말한 적 있다. 나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든 슬픔을 안고 큰 병원에 갔다. 노의사였는데 그는 많고 많은 환자 중 흔하디 흔한 1인으로 나를 대했다. “수술하면 돼~ 한 번해서 안되면, 두 번 하면 되고~ 그러면 끝나요” 커뮤니티에서 그 의사는 그쪽 분야에선 유명하지만 불친절하다, 반말한다, 무성의한다…라며 상처받을 각오하아고 했는데 난 그 무심한 불친절함과 대수롭지 않은 무례함에 위로됐다. 난 나보다 더 위독한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그런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보는 의사에게 ‘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라고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동물병원에서도 감정적으로 자책과 죄책감을 잔뜩 안고 있는 나에게 그 감정을 더하는 수의사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 이사를 앞둔 지금, 과연 그런 동물병원이 새로운 동네에도 있을지 걱정이다.


한편으로 내 고양이뿐 아니라 매사에 내 탓하는 나의 무게를 덜고 싶다. 내 탓만 하기엔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다. 그러니 당분간은 혹은 앞으로는 조금은 무책임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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