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지자
결혼하기 전, 내가 극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7년 넘게 사귄 남자치구와 헤어지고 길 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호소하고 싶을 정도로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친한 친구는 물론이고, 회사 선배, 동료들에게도 내 고통을 토로하던 시절. 세상엔 혼자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슬픔이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오롯이 홀로 겪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이었다.
이별 직후엔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내 감정을 쏟아 내는 행동이 얼마나 민폐인지 모른다. 이별이 진행중인 사람은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좀 놓이니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의 연애는 특별하게 느껴진다. 주변에 드라마 작가가 있다면, 그 모든 이야기를 대본으로 써 달라고 청탁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또 누구나 그렇듯 사귄 기간이 7년이 됐든, 70년이 됐든 어떻게 만났든 연애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다. 내 연애의 특별함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니 내 7년의 연애가 너무 뻔한 드라마처럼 끝이 났을 때 나보다 7살이나 많은 선배의 눈엔 어떻게 보였겠는가. 잡지사 기자 중에서도 진짜 ‘글쟁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한 문장력을 가진 선배는 당시 지금의 내 나이 치고도 꽤나 어른스러웠다. 선배는 글쟁이답게(?) 연초 담배를 태웠는데, 특유의 진한 눈썹을 찡그리며 연기를 내뿜을 땐 정말이지 같은 여자가 봐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당시 선배의 집은 북촌 한옥마을 어딘가였다.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본질을 꿰뚫는 멋을 아는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개조한 한옥으로 이사했다니, 근사했다. 아주 아담한 마당도 달려 있는 집으로, 아직 독립하지 않은 나에겐 2~3년 사이에 2번의 이사를 거뜬히 해내는 선배가 그저 멋있어 보였다.
난 실연 당한 채, 그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안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 주말까지 있을 순 없었다. 선배의 집으로 향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전 남자 친구와의 연애 이야기를 다 들은 선배는 주변에서 들은 이런저런 연애담을 얘기해주었다. 당시 내 귀에 박힌 건, 그렇게 헤어지고 재회한 연인의 이야기였지만 지금까지 내 마음에 담겨 있는 건 그 말이다.
“지금 그 감정 그대로, 글을 써봐. 얼마나 좋은 글이 나오겠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얼마나 괜찮은 글이 나오려고 이러나 하면서. 그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거든.”
당연히 나는 그때 선배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감 원고도 겨우 쓰고 있는 중인데 이 벅찬 슬픔을 글로 쓰라니? 선배는 내 슬픔과 고통을 너무 가볍게 치부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그때 내 슬픔이 어느 정도까지 다다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실제로 연인과 헤어진 이후부터 하루, 하루씩 글을 쓴 작가도 있다고 말해줬는데 그때 난 왜 선배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역시 어른의 말은 일단 듣고 볼 일이다.
요즘 난 주 4회 이상 일기를 쓴다. 아무 생각도, 감정도 느끼지 않은 날은 없다. 그러니까 일기장 한 페이지에 남길 말이 하나도 없는 날은 없다. 나는 살아가고 있기에, 일기장에 채울 수 있는 것들은 너무 많다. 내가 생각하는 ‘근사한’ 글이 아닐 뿐.
결혼 전에 너무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난 항상 ‘강해지자’라는 말을 되뇄다. 그때 썼던 SNS를 보면 온통 그 말뿐이다. 그때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강해지자는 일종의 강박 같은 거였다.
결혼한 지금은 의지할 누군가 옆에 있어서일까? 자꾸만 쉽게 주눅 들고, 나자빠지고 싶어 진다. 생각해 보면, 나는 현재 남편과 연애한 이후로 줄곧 이 상태였던 것 같다. 자신 만만하고, 열정적인 나를 보여준 적이 없다. 낙담하고, 실망하고, 냉소하며 무기력한 모습. 살면서 단 한 번도 멋있다고 느낀 적 없는 모습이다.
언젠가 10년 넘게 혼자 살던 친구 C가 오랜만에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집에서 다른 절친한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바퀴벌레가 나오자 유난스럽게 소리 지르며 어쩔 줄 몰라하며 오빠에 내일 잡아달라고 해야겠다고 말하자, 친구가 강하게 단속했다고 한다.
“차 OO!(C의 이름 석자) 너 혼자 살 때 바퀴벌레쯤은 잡아 죽였다! 정신 차려라!”
순간 C는 부끄럽고 민망했다고 했다. 언제부터 내가 바퀴벌레 한 마리에 이렇게 질색팔색했나, 라며. C는 그 후로 혼전임신을 하고, 연애 1년 만에 결혼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30대 후반, 지금 내 나이 40대 초반.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이다. C의 이야기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20살 이후로 약 20년 간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아왔는데, 결혼하고 나니 되레 약해지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한동안 내 일기장에서 멀어졌던 그 말을 다시 되뇐다.
강해지자.
그리고 이 모든 터널은 끝이 날 것이며, 끝나기 전에 모두 잘 기록해 두자. 얼마나 좋은 글을 쓰게 되려고 이런 시련이 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