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껏 알아듣는 건 너무 어려워!
내가 최근까지 챗GPT에 가장 많이 물어본 것은 ‘팀장님이 말한 의도’였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잡지사에서는 나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연차가 쌓이면 대부분의 일을 자기 주도적으로 했다. 해당 달에 내가 제안한 아이템으로 기사를 쓰고, 내가 섭외한 셀럽을 인터뷰하고, 내가 만든 시안으로 촬영이나 페이지 구상을 했다. 그러니 회사원치곤 ‘나’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역량이었다.
첫 잡지사 상무님은 “우리 편집팀에는 또라이가 없어. 또라이는 한 명쯤 있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여기서 말하는 또라이는 4차원처럼 사회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을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나처럼 성실하게 마감을 잘 지키고 근태가 무난한 기자는 ‘범생이’로 통했다. 일반 직장인에게는 당연한 것이 잡지사에서는 오히려 튀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두고 패션팀 선배는 “너 같은 사람이 패션지에서 일하는 게 난 너무 신기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튀지 않고 무난했던 내가 보험사에 오니, 오히려 완전히 튀고 유난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 조금 까칠한 사람, 윗사람의 말에도 반기를 드는 사람… 나를 설명하는 모든 말은 결국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귀결됐다.
언젠가 인사 발령을 앞둔 회사 동생 J와 나눈 대화는 보험사의 보수적인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로 J는 이 회사가 첫 직장이며 벌써 입사 15년 차가 되는, 나에겐 회사 선배다.)
나: 발령 났어?
J: 아니, 아직.
나: 그 팀으로 발령나는 게 너한테 유리하고, 네가 원하는 거 아니야?
J: 언니, 아직도 이 회사를 몰라? 여기선 내가 원하는 걸 말하면 별의 별 말들이 나와. 팀장님이 발령 원하냐고 물었을 때도 난 그냥 회사 지침 따르겠다고 했어.
나: 내가 원하는 걸 말하는 게 왜 문제가 되는 거야?
J: 음..글쎄 하여튼 언니, 여긴 그래.
입사 후 나는 현재 팀장과 다섯 번 넘게 면담을 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고, 원하는 바를 분명히 말했다.
팀장은 회사에서 알아주는 ‘젠틀맨’이자 ‘워커홀릭’이다. 평판이 중요한 이 회사에서 그런 수식어는 큰 자산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언어는 매우 우회적이고, 말투는 다정하다. 팀장은 내가 전혀 다른 업계에서 이직했고 공채와는 성향이 다르다는 점을 전제로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리액션을 자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말을 100% 믿지 않는다. 순진하게 믿기에는 그가 공채 직원들에게 보이는 강한 어조가 나에게 대하는 태도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완전히 정반대라고 할 순 없어도, 적어도 70~80% 정도는 다르다.
얼마 전 장기 휴가를 쓴다고 했을 때도 그의 반응은 늘 같았다.
“응~ 다녀와~ 맘 편히 다녀와.”
내가 그의 말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공채들에게 대하는 말투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정확히 이 회사의 언어를 장착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사람들이 굉장히 ‘나이스’하다는 것이었다. 대기업이라 연봉이 높아서인지 다들 여유가 있고 젠틀했다. 업무적으로 무언가 부탁할 때도 이른바 ‘쿠션어’를 많이 썼다. 그걸 눈치 챈 나는 언제부턴가 “아 됐고, 본론부터 말해요”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들의 언어를 곰곰이 살펴보니, 기본적으로 영업을 했던 사람들의 방식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영업 현장에서 주로 만나는 대상은 자기보다 연배가 높은 경우가 많다. 상대의 성향을 알지 못한 채 말의 진의가 어떻게 전달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무난하게, 누구에게나 통하는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지점장의 말투는 대다수에게 잘 ‘먹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팀장은 면담만큼은 솔직하길 바란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불만인지… 팀장은 1년에 몇 번 없는 면담에서만큼은 듣기를 원한다.
팀장과 첫 면담 후 회식 자리에서 그는 내 이름을 언급하며 말했다.
“면담 때 다 가식 떨고 말이야. 면담하면서 가장 솔직하게 잘 말했던 사람은 J과장밖에 없어.”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말을 100%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기위해선 나의 솔직함만이 무기가 된다는 것을. 어쩌겠는가, 이게 나인걸.
면담 때 아무리 말해도 바뀌는 건 없지만, 나는 나대로 솔직히 표현하는 쪽을 택했다. 이 회사에서 나만 투명한 속내를 가지고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손해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상사가 “눈치껏 메시지를 파악하라”고 했을 때, 나는 그걸 제대로 파악할 정보도, ‘눈치’도 없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표면적인 말을 그대로 믿으려 노력한다.
덕분에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숨은 의도를 파악하려는 버릇이 생기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