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잎_안하던 짓

70대 나훈아에게 듣다

by 집필앤하이드

사실 나는 요즘 TV만 켜면 흘려 나오는 트로트에 질려 있는 상태다. 진작부터 트로트의 뽕짝 리듬만 생각해도 멀미가 난다. 잔뜩 밀린 차 사이에 섰다, 가다를 반복했던 아빠의 차, 분명 향긋한데 자꾸면 역하게 느껴졌던 방향제, 그 틈을 가득 채우는 뽕필 가득한 트로트. 내게 트로트라는 장르는 그런 인상이다.


그런 내가 어제 TV를 돌리다 채널을 멈췄다.

명절 때마다 TV에서 해주던(걸로 기억하는) 나훈아 콘서트에 올해 사람들은 유난스럽게 더 난리였다. (전날 본방을 했고, 내가 본 건 특별방송이었다) 물론 코로나19라는 전무후무한 상황을 겪고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나는 더욱 유난스러워보였고, 그 유난스러움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이돌들이 팬들을 위해 언택 공연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데뷔한지 54년이 된 노장의 슈퍼스타가 공영방송에서 언택 공연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자체도 화제였는데, 나훈아의 이번 콘서트는 기대 이상이었다.

어떤 공연에 비견해도 빠지지 않을 엄청난 무대영상,CG로 KBS는 자본력을 맘껏 뽐냈고, 비록 공연 현장에는 없지만 한 마음 한 뜻으로 공연에 심취한 세계 곳곳에 있는 나훈아의 팬덤 역시 엄청났다. 직관적인 가사와 나훈아 특유의 표정은 짤 제조기라는 말이 나올만 했다.


특히 내 눈길을 잡은 건, 다름 아닌 나훈아의 멘트였다.

뭐, 지금까지 정치적인 말로 해석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건 내 관심 밖이다.

신곡 <테스형!>과 <청춘을 돌려다오> 사이에 나온 말이었다. 정말 칠십 평생을 살아야지만 할 수 있는 말이었고, 또 울림이었다.

"세월은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가게 돼 있으니 이왕 세월 가는 거 끌려가면 안된다. 우리가 세월의 모가지를 딱 비틀어 끌고 가야 한다.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면 세월한테 끌려가는 것... 안하던 짓을 해야 세월이 늦게 간다" KBS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중


흔히 안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됐다고 하는데 나훈아는 그 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 그 흐름을 늦출 수 있는 건, 안하던 짓을 하는 것.

문득 요즘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나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기 위해 안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평범한 나의 일상은 영위하되, 살짝 비틀어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 다행히 지금까지는 꽤 잘 먹혔다.


첫째, 출근 전 시간을 활용해 운동하기. 헬스는 등록만 해놓고, 돈지랄하기 일쑤였는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퇴근 후에 운동을 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그 시간은 내 의지의 시험을 많이 받았다. 갑작스럽게 저녁 약속이 생기거나 야근을 하게 되면 그날 운동은 못하게 된다. 이왕이면 내 의지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침 알람 소리에 잠을 깨느냐, 마느냐 정도라면 가능하겠다 싶었다. 변수는 단 하나, 나였으니 비교적 간단했다. 지금까지 주3일 이상 운동을 하겠다는 내 목표는 얼추 달성하고 있다.


둘째, 일 외적인 사람들을 만나기. 일 때문에 만난 사이가 아니라면 늘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나의 인간관계를 조금 넓혀보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나의 나이, 나의 직업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 실제로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과소 평가를 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봤자 기자나부랭이, 잡지쟁이라며. 다행히 내가 새로 소속한 집단에서는 나의 직업을 무척 '특별하게' 생각하고 신기해한다. 그것만으로도 일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은 사~알짝 달라졌다.


셋째, 요리하기.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집밥 해먹을 기회가 많아졌다. 요리에는 영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파스타, 아보카도 샌드위치, 버섯전, 호박전, 김치찌개, 김치볶음 밥, 카레... 그래봤자 아주아주 간단한 레시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성취감을 꽤 느낀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앞으로도 내 요리 능력치는 점차 오를 것이다.


넷째, 할 말은 그 즉시 하기. 마음에 담아놓고 끙끙대던 나는 이젠 없다. 단 한순간도 참지 않는 건 아니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내가 너무 꼬여 있을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다 고려하고 난 후 지른다. 최근엔 처음 본 사람(친구의 친구)이 너무 무례하게 말해 그 자리에서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말해버렸다. "제발, 그 말은 안하시면 안될까요? 저는 그 말이 너무 불편하게 들리네요" 최대한 정중하게. 이후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친구에게 "그렇게 먼저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불편하다면, 함께 있는 다른 누군가도 불편할 수 있다라는.


안하던 짓을 많이 하다보면, 진짜 죽을 때가 다가올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안하던 짓을 차곡차곡 하다보면, 적어도 안해봐서 속상하거나 후회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나훈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안하던 짓을 더 연구해서 계속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70대 노인의 엄청난 에너지는 나에게 그렇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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