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스승(1)

내 인생의 스승

by 집필앤하이드

재물복, 인복 등. 사람마다 태생적으로 갖게 되는 복이 있다면 나는 '스승 복'이 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봐도 우리 엄마는 내가 학교에 진학한 이후에 줄곧 담임 선생님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새 학기를 앞두고 있을 때마다 엄마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데.."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고, 새 학년을 맞이할 때면 묻곤 했다. 담임 선생님은 어떤 분인 것 같냐고.


다행히도 난 중요한 시기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혹독한 사춘기를 앞두고 있던(혹은 이미 그 시절을 보내고 있던) 시기인 국민학교 6학년 때와 험난한 입시를 2년 앞두고 있던 시기인 고등학교 1학년 때.


1997년, 사업을 하던 아빠는 IMF 경제 위기 한복판에 있었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전까지 우리 집은 경기도 용인에 꽤 넓은 평수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IMF 탓에 부득이하게 땅값이 오를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어 팔아야 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그땐

집에 아빠를 찾는 전화가 오면 "계시지 않다"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늘 정직하고 바르게 살라고 했던 엄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가르쳤던 때였다.

엄마는 자주 울었다.

내 앞에서 유독 많이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의 눈물을 자주 보게 됐다. 울먹이며 통화를 하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엄마의 감정은 나에게 잘 전염됐다.

라디오를 끼고 살던 시절, 종종 나는 사연을 써 라디오 프로그램에 보내기도 했다.

가끔 당첨이 돼 상품을 받기도 했다. 글 쓰는 게 좋았다기 보단 라디오에 '경기도 수원에 사는 전소영 씨'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게 신기하고 좋았던 것 같다.


6학년이 되기 전까지 나의 성정표는 우 아니면 수 가끔 미가 있었고, 담임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내성적이지만 밝은 아이'정도로 내 성격을 정의했다. 어렸을 때부터 발육이 남다른 나는 또래보다 키가 컸다. 그래서 늘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용하지만 키가 큰 아이. 그때 나보다 한 뼘 더 크고, 몸집이 더 푸짐한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푸근한 성격까지 있어 친구들에게 '엄마 같다'는 평을 들었다. 물론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도 키가 큰데 왜 그 친구처럼 다른 친구들에게 주목받지 못할까? 교실에서 실수한 친구를 감싸며 걸레질로 뒤처리까지 담당하는 그 친구를 보며 이내 나는 포기했다. 그 정도로 타인에게 헌신할만한 '깜냥'이 나에겐 없었다. 그렇게 내 국민학교 6년은 조용히 내성적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다. 뭐, 별 기대도 없었던 것 같다.


여느 때처럼 6학년 새 학기를 맞아 나는 낯선 교실의 공기를 맡고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만한 아이들을 스캔하고 있었다. 물론 맨 뒷자리에서. 담임은 처음 우리 학교로 전근 온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어떤 평판도 주워들을 수 없었다.

이마가 좀 넓고 까무잡잡한 피부로 말랐지만 어쩐지 다부져 보이는 체형.

기선제압이었을까? 이병준 선생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다양한 룰을 제시했다. "선생님이 귀를 만지면 손 머리 위로, 코를 만지면 박수를 쳐라" 뭐 이런 식이었다. 선생님의 룰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옆에 있는 친구가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대 때리라는, 다소 폭력적(?)인 방식의 벌칙도 허하셨다.


선생님은 조금 생경한 것들을 우리에게 많이 알려주셨다. '조별'이라는 표현 대신 '모둠 별'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족구, 피구, 야구, 축구도 아닌 손발머리 모두 쓸 수 있는 '막구'라는 종목을 알려주는 둥.


5년 국민학교 생활 동안 이런 선생님은 처음이었다.


매주 학급 신문을 제작했고, 때마다 문집, 시집 등을 제작했다.

거기에 들어가는 글 대부분은 우리가 날마다 쓰는 일기장 일부 혹은 모둠별 과제로 준 글쓰기(사설, 논설문 등)였다. 선생님은 '열린 교육'을 FM으로 지키는 분이었고, 주변 선생님들에겐 '별난 사람'으로 통했다. 어린 우리 눈에도 선생님은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듯했다. 그래서 싫지만 짠하고, 밉지만 좋았다.


6학년 때 IMF로 인한 엄마의 고된 삶과 감정은 최고조에 달해있을 때였다. 그 모든 감정은 나에게 전염됐고, 난 그 감정을 풀어낼 만한 곳이 필요했다. 라디오에 사연을 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일기장에 적었다. 엄마의 상태, 그런 엄마를 보며 내가 걱정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등. 어느 순간 나의 일기장은 담임선생님에게 전하는 편지가 됐다. 선생님은 이따금씩 나의 일기장을 친구들에게 읽어주었다. 나는 좀 부끄러웠다. 애들은 키만 멀대 같이 크고 무뚝뚝한 나를 두고 '전봇대'라고 불렀으니까, 나도 거기에 익숙했으니까.


선생님은 애들 앞에서 "소영이처럼 솔직하게 쓰는 게 일기다"라는 식으로 나를 칭찬했다. 왜 내 사생활을 이렇게 공개하는 걸까라는 불쾌한 감정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나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걸 잘하는구나, 키만 큰 내가 잘하는 것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된 첫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선생님이 내 일기장을 읽어줄 때마다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반 '아싸'에서 '인싸'가 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꽤 많은 글이 학급 신문, 문집에 실렸다. 나름 선별된 글에 내 글은 빠짐없이 뽑혔다.


6학년 2학기가 됐을 때 난생처음 난 학급 반장이 됐다. 나도, 엄마도 어리둥절해했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 좋다는 말을 많이 들은 오빠가 반장이 되는 건 몰라도, 내성적이고 무뚝뚝하기만 한 내가 반장이 됐다는 사실에.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그야말로 '나대는 캐릭터'가 되는데 기반(?)이 된 건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아, 나도 할 수 있구나, 그런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딸, 빨리 철든 딸의 인생이 시작됐다.


엇나가거나 반항하는 행동이 20대가 돼서 느지막이 시작된 건,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반항기 충만'질량의 보존 법칙이 있어 생애 꼭 한 번은 반항을 해야 한다면,

남들 다 하는 10대 시절 말고, 20대 시절에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내 삶의 가치관, 방향을 가장 먼저 잡게 되는 시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10대가 맞는 것 같다.

그 시절에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듣고 경험하느냐가 30대 중반인 나에게도 영향을 준다.

그때 그 선생님이 지금의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무거운 중심추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 선생님을 또 언제 만나겠냐고?

5년 전쯤 반창회가 열렸고, 이병준 선생님과 재회했다.

(아침마다 전교생 모두와 하이파이브로 인사를 하는 한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돼 있으셨다)

조금 늙으신 것 같긴 했지만 그 표정, 그 말투는 그대로 셨다.

그리고 선생님은 잊지도 않고 물으셨다.

"너희 아버지 사업은 요즘 어떠시냐?"

그러니까 잘 살아야 한다. 언젠가 내가 가장 맑고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스승이 있는 한.

그런 의미로 나의 스승복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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