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솔직한 선생님
어른들이 10대에게 가장 많이 주는 겁 중에 하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학과 과정은 천지차이라는 것.
여태껏 대충 얼버무려 공부하고, 시험 치는 생활은 이제 끝이니
잔뜩 긴장하고 그 어느 때보다 학구열을 불태워야 하는 시기.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는 건 분명 16살에서 17살이 되는 찰나의 순간임에도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때 얼마나 공부를 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나의 인생이 결정될 수도 있는 것이니, 아이도, 부모도 긴장할 시기인 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의심과 긴장으로 점철된 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평준화였던 수원에서 나는 엄마의 뜻에 따라 1 지망, 2 지망 모두 여고를 지원했다.
1 지망은 수원에서 전통 있기로 유명한 곳이었고, 2 지망 학교는 이제 생긴 지 얼마 안 된 학교였다.
나보다 2년 먼저 1 지망에서 떨어져 2 지망 학교에 붙어 난생처음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쓴 경험을 한 오빠와 같은 단계를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심 있었다.
그냥 뭐든 첫째의 시행착오나 실패가 둘째에게는 비껴가길 바라는 엄마의 욕심이자 바람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대수인가 싶은데)
다행히 나는 1 지망의 불타는 고구마 색 교복이 인상적은 전통의 그 학교에 진학했다.
어리바리했지만 다행히 같은 반에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있었고, 여러모로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가 컸다.
입학하고 첫 조회시간이었던 것 같다.
무쌍 커플 눈에 쇼트커트보다는 좀 긴 헤어 스타일의 여자 선생님이 우리의 담임이라며 등장했다.
차가워 보였다.
이런저런 안내를 한 후에 선생님은 말했다.
"반장을 뽑아야 하는데, 가만있어보자.."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름을 주르륵 불렀다.
6번째쯤인가 내 이름이 불렸다.
그러면서 갸우뚱해하며
"음.. 넌 애매하긴 한데, 그래 뭐 여기까지 부른 사람이 반장 후보야" 라며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알고 보니 우리 반 입학 성적순으로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선생님은 반장이라면 으레 이 정도 성적이 돼야 한다는 나름의 신조가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았지만 선생님은 별 생각이 없었다.
난 애매한 성적으로 턱걸이로(?) 반장 후보가 된 것에 심히 자존심이 상했다.
어찌어찌 나의 소개를 하고, 반장 후보로서 포부를 밝혔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애매한 성적으로 후보가 됐지만 반장 일만큼은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속내를 말하는 것에는 그리 거리낌이 없었으니.
그렇게 나는 반장이 됐고, 담임 선생님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전형적인 '외강내유'형 어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분명 말을 세게 하고, 소리도 많이 지르는데 우리의 말에 웃기도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사회'시간에 자율학습을 하게 됐는데 어떤 계기로
선생님은 그 시간을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해줄게' 시간으로 바꾸며 선심을 베푸셨다.
가뜩이나 따분하고 공부도 하기 싫었는데 합법적으로(?) 딴짓을 하며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별의별 질문들이 다 나왔다.
"선생님 남편이랑은 어떻게 만나게 됐어요?"
"선생님 옷은 어디서 사세요?"
"머리는 왜 맨날 똑같으신 거죠?"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됐어요?"
뻔하디 뻔한, 그리고 순진한 여고생들 질문이 이어졌고 가볍게 받아치던 선생님이 버벅 댈수밖에 없는, 질문이 마침내 나왔다.
"선생님, 그 오르가슴이라는 게 뭐죠?"
그때 그 단어를 알던 애가 몇이나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저 질문을 한 친구가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해, 혹은 되바라져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호기심 천국.
그날 우리 교실의 분위기는 그랬다.
사실 나도 그때 처음 그 단어를 들었다.
떽! 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낼 법도 한데 선생님은 조금 더듬으며 답했다.
"그건.. 어.. 너네가 아직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야.
그러니까 행복과 기쁨 그 이상의 감정이지.."
선생님은 그 질문에 용감하게 맞서 답했다.
선생님은 아마 당시에 형편없이 부족했던 성교육의 현실을 일찍이 인지했기에 그 질문을 나름의 지식으로 솔직하게 답했던 게 아닐까?
오르가슴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내 뇌리에 박혔고, 언젠가 친오빠와 얘기를 나누다
알고리즘을 오르가슴이라는 단어로 바꿔 말하는 바람에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는 일도 발생했더랬다.
선생님은 내가 아는 어른 중에 가장 솔직했다.
화가 나면 화를 냈고
웃기면 웃었고
짜증이 나면 신경질 난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 내용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알려줬다.
학습 자료로 <한겨레 21>을 복사해서 나눠줬고, 정치가 왜 필요하고, 또 왜 배워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선생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두는 편이었지만
우리 학년 중에 우리 반 성적이 꼴찌라 속상해하기도 하셨다.
다른 반 선생님이 우리 반에 들어와 수업할 때면
"너네 담임선생님이 너네가 얼마나 공부를 못해서 속상해하는지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다.
우리는 그런 선생님께 보상이라도 하듯 공부 빼고는 모든 걸 1등 했다.
합창대회, 체육대회 응원상 등.
나는 1학년 2학기가 될 때까지 애매한 성적을 유지(?)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에게서 무엇을 보신 걸까?
대뜸 1학년 2학기 때 전교 부회장 선거가 있으니 출마해보라고 했다.
난 교무실을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는 반장이었고, 틈나면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다.
(당시 엄마는 일을 시작하게 돼서 너무 바빴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은 담임선생님뿐이었다)
일단 해보라고 하셨다.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다고.
그렇게 나간 선거에서 나는 당선이 됐다.
여전히 선생님이 나에게서 무엇을 봤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애들보다 조금 성숙한 내가 보였는지,
이놈 공부도 애매하게 하니 이참에 학생회 활동으로 대학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어쨌든 그 덕에 나는 더욱더 자신감을 갖고 학년 진급을 하면서 내친김에 전교회장까지 하게 됐다.
나에게 선생님은 부모님 외에 다른 어른도
충분히 의지하고, 믿고, 기대도 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다.
그리고 이만큼 솔직한 어른도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도.
완벽하지 않은 부모의 빈틈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가 선생님이라는 것도.
몇 해 전, 본인이 가르치는 아이를 미움도 모자라 적대적으로 여기는
초등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아이들에 대한 시선이 느껴지는 몇 가지 에피소드는 어찌 보면 그의 입을 통한 것이라 크게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세번째 만남에서 음식점을 함께 가는 길에 마주한, 무해한 아이들을 그가 힐끔 보며 했던 말과 말투가 지금도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다.
"저런 애들이에요, 제가 가르치는 애들이"
그 말끝에 "쯧"자가 붙어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기껏해야 초등학교 4~5학년쯤 돼 보였다.
이미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의 비슷한 또래만 봐도 진절머리가 나는 듯 했다.
그 아이들은 그저 신호를 기다리며 스케이트보드를 탈 생각에 들떠 있었을 뿐인데..
그는 그 존재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그와 잘해 볼 자신이 없었다.
요즘 아이들의 버르장머리를 논하기엔 그들이 나에게는 너무 먼 존재라는 것도 알고,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무슨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성급한 일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선생을 떠나 어른의 너그러움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이와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아이를 낳아보거나 조카도 없지만 카페나 음식점에서 자주 보이는 '노키즈존'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그 말을 내뱉는 것이 곧, 미성숙한 어른임을 내비치는 것 같아서다.
그만큼 성숙하지 못한 어른 곁에 있는 아이, 그런 아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 사이에 껴 있는 느낌이 들어 영 불편하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선생이란 직업은 꽤나 어른스러운 사람들의 것이다.
오르가슴이라는 감정에 대해 조금은 당황스러워도, 차분히, 설명해줄 어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