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 / 새 깃발

누군가는 또 새 깃발을

by 정태춘
비상구 : 새 깃발 복사.jpg


나의 붓글


“붓글”이 뭐나고 묻습니다.

붓글은 <붓으로 쓰는 글>입니다.

“글”은 조형으로써의 “글씨”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문장이지요.

말이고 이야기이지요.




서예와 캘리그라피가 있습니다.

정통 <서예>는 아주 오랜동안의 수련을 필요로 합니다. 훌륭한 서예 글씨들을 끝없이 따라 쓰고 그 엄격한 서법과 필법들을 체계적으로 익힌 후에 앞선 이들의 글씨 처럼 쓰거나 자기 나름의 글씨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캘리그라피>가 있지요.

서예 공부를 했거나 안했거나, 그 정통 서예적 법도와 미감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글씨를 조형적으로 그려내는 일입니다.




훌륭한 서예가들도 많고, 탁월한 캘리그래퍼들도 많습니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끼일 만한 좋은 글씨를 써 내지 못하니 내 건 서예도 아니다, 캘리그래피도 아니다.. 합니다.

내 작업은 그저, 내 안에 말이 있어 그걸 붓으로 써내는 일입니다.

물론, 말을 다듬고 거기에 맞는 뉘앙스의 좋은 글씨가 되어야지요. 때론 거칠게 때론 차분하게, 사람들이 말의 내용에 따라 성대를 조절하듯이 나름 긴장감을 가지고 그렇게 글을(글씨를) 씁니다.

그런데, 글씨가 아무리 좋게 써진들 글의 내용이 마음에 안들면 무엇하겠습니까. 그건 버려야지요. 핵심은 “글씨”가 아니고“말”(글)에 있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붓을 들어 거기에 어울리는 글씨를 쓰고, 할 말이 없으면 그저 글씨 연습을 합니다.

물론, 말을 시각화하는 글씨도 거기에 맞게 좋아야 하니까요. 그 둘이 다 밖에 내 보일만 해야겠지요.




생전에 신영복 선생께서 “난 한 번도 서예가라고 말 한 적 없습니다. 서예 전시회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시더군요. 그 땐 그 분의 말 뜻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이 서예라는 것의 일반적 관행이나 한계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관행이나 한계는 내가 여기서 말할 것은 못되구요, 그러면서 그분은 말년에 붓글씨와 컬러 삽화가 곁들인 작업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조금은 더 자유로운 공간으로 나오시기도 했었지요.

아무튼 그분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특별한 글씨체를 완성하시기도 하고, 그 글씨체로 또 훌륭한 단문들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늘 아쉽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학자가 아니고 예술가이셨더라면.. 자신의 엄격성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자재한 글씨와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내시지 않았을까..

나는 그걸, “붓글’이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주로) “붓으로 풀어내는 이야기”, 그게 내가 생각하는 <붓글>입니다. 그 담화의 내용과 글씨의 조형성이 잘 갖춰지면 특별한 울림을 가지는 것이지요.



나는 그저 한문 공부를 시작했고, 그걸 붓으로 쓰기 시작했고, 내 안에서 한시가 나오게 됐고, 그러다가 한글로 내 말을 하게 됐고.. 그 말이 막히니 접었다가, 지금은 옛 사진들을 보면서 다시 이야기가 나와서 거기에 글을 써서 얹히고 있습니다.




탁월한 서예가, 캘리그래퍼들이 보다 다양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글씨로 풀어내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또, 많은 시인들이 자신만의 필치로 자기 이야기를 종이 위에 풀어내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또 물론,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종이 위에든, 타블렛 위에든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는 즐거움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쓸 말들을 다듬어 내고 그걸 생각하고 생각하는 시간들, 글씨들의 크기와 표정과 평면 구성에 관해서도 고민하고, 결국은 몸으로 써내는..

<붓글>은 그런 재미입니다.


내 브런치는 지금 사진에만 글을 얹히고 있지만 그런 작업의 일종..의 공간입니다.




*사족/

좋은 글에 좋은 글씨, 거기에 아주 잘 어울리는 좋은 그림까지 그려 얹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종이(공간) 위에 말입니다. 그게 “현대 문인화”다.. 라고 누가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최고이지요.

그런 것도 늘 생각하면서 나의 옛 사진에 두런 두런 글을 얹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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