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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Teacher Jul 26. 2023

특명! 병가 기간 안에 추후 치료 방안을 결정하라.

서울 병원 투어를 통해 나에게 맞는 병원을 찾아봅니다.

 돌발성 난청으로 입원치료 중 청신경종양을 발견하게 된 나는 종양 발견과 동시에 퇴원을 하게 되었다. 퇴원 시 나의 한 손에는 안정가료가 필요하다는 4주짜리 진단서 한 장이 들려있었다. 그 말은 즉 4주 동안 나는 내 몸을 출근을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최대한 끌어올려야 했다. 적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바심이 났다. 이 조바심은 4주 후 출근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병가를 더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교육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1년 중 60일의 병가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병가는 내가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년 중 6일의 병가가 넘어가면 병원을 다녀왔다는 증빙 서류 또는 병원에서 안정가료가 필요 다하는 진단서가 필요하다. 만약 60일이 넘어가도록 회복을 하지 못한다면 병휴직으로 넘어간다. 병휴직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하면 되는 것을 뭐 그리 걱정하나 싶겠냐만은 우선 우리 집은 아빠가 육아휴직 중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1년 동안 우리 집의 가장이라는 것이다. 신랑은 이른 복직을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신랑이 학교에서 1호 아빠 육아휴직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도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병가 60일을 잘 나누어 사용해야 했다. 언제 어떻게 아파질지 모르니 지금이라도 출근을 할 수 있다면 출근을 하여 하루라도 병가를 아껴놓고 싶었다. 만약 방사선치료를 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이 아플 예정이니 말이다. 맘 같아서는 지금 당장 해달라고 떼라도 쓰고 싶었다. 어차피 적응해야 할 몸 종양을 죽여놓고 최악의 상황에서 적응하는 동안 병가를 쓰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의 시기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4명의 서울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을 만날 예정이었다. 맞는 의사 선생님을 찾기 위해서였다. 좋은 의사 선생님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최악의 경우를 많이 이야기해 주는 의사 선생님에게 마음을 다치지만, 우리 아빠에게는 최악을 많이 이야기해 주는 단호한 선생님이 더 신뢰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갈 때마다 다른 의사 소견과 치료의 시기와 방법에서 내가 판단할 수 있으려면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아무리 날짜를 잡아도 병가기간 중 모두 끝나진 않았다. 유명한 의사들이었기에 지인찬스를 써도 만남은 더 힘들었다. 병가 기간 중 모두 끝낸 후 1년의 치료 계획을 원장, 원감 선생님께 말씀드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일 병원 예약창을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다. 혹시나 나올 취소표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일주일을 공들인 결과 나는 예약 일정을 수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나를 위해서도 필요하였지만, 함께 일하는 유치원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모두 걱정하고 이후의 일정을 궁금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당장 유치원에 가지 못한다면, 빨리 대체 교사를 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병원은 이번 기회에 모두 다녀왔다. 건물이 아주 새것처럼 번쩍하였지만 감마나이프 시술을 하는 곳은 노후가 된 곳도 있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의사의 성향도 모두 달랐다. 병의 치료 방향과 갖게 될 부작용을 단호하게 말하는 것에 중점을 둔 의사와 병이 왜 생겼고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후 내가 겪게 될 불편함을 쉽게 풀어 설명해 주는 의사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 젊으니 청력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추적검사만 해보자는 의사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해보자는 의사로 나뉘었다. 가장 중요한 감마나이프 시술을 한 후에는 100% 죽은 청력이 될 것이라는 의사와 시술을 했을 때 유효한 청력일 경우가 50%, 죽은 청력이 될 경우가 50%라는 의사의 소견도 나뉘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방사선이 들어가면 청신경 손상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었다. 살리고 싶다고 하여서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4번의 서울 병원 투어를 끝냈다. 그렇다고 하여 병원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병원 중 1곳에서 '돌발성난청' 증상으로 갑자기 청력이 떨어졌기에 3개월 동안은 회복할 확률이 있으니 청력치료를 한번 해보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감마나이프(방사선치료)의 시기와 2회 분할 방법, 의사 등이 가장 마음에 맞는 병원이 있음에도 그 청력도 소중하다는 말이 가슴 한편이 울렸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청력도 소중하고 종양도 중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주 비싼 약으로 2달 동안 청력치료가 시작되었다. 2달간은 치료 뱡향 생각을 조금 접어두기로 하였다. 약을 다 먹고 다시 청력검사를 하고 난 후에 결정을 해도 늦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뜻하지도 않게 긴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올해 안에 모든 것을 끝내고 60일의 병가를 마무리하겠다는 나의 계획과는 달리 내 병은 아직 해야 할 게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급하게 나를 떠나갈 생각은 없나 보다. 그리고 나에게 아직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가 보다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귓속 종양과 함께 더 긴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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