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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니 최 Jun 22. 2022

소녀의 탄생

<웨딩피치> 감상문

소녀의 탄생

<웨딩피치> 감상문         



  

  소년은 만들어진다. 생물학적 성별 (sex)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 성역할 (gender)을 말하는 것이다. 사회학적 성역할은 사회적 관습에 의해 학습되는데, 아이들이 보는 모든 것은 학습이 된다. 남자아이에게 날 때부터 파란색 옷을 입히고, 어린 여자아이들을 ‘공주’라고 부르며 기르는 모든 행위들의 사회적 성역할을 학습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커다란 로봇들, 격렬한 전투신이 등장하는 만화 영화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로봇은 남자아이들의 장난감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명백한 편견이다. 어쨌든 로봇을 무기로 인식하는 견해와 전투를 남성의 역할을 규정하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로봇은 남자아이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무장에 대한 경도’라는 사춘기적 욕망의 발현이 된다. 이 같은 욕망을 바탕으로, ‘소년’은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소녀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웨딩피치>는 토미타 스케히로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는 1996년 mbc를 통해 방영되며 큰 인기를 모은 변신소녀 물이다. 모든 변신소녀들이 그렇듯, 주인공인 ‘피치’는 지각을 자주하고 공부를 못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그런 피치의 앞에 어느 날 천사들의 보물을 빼앗기 위해 왔다며, ‘악마’가 나타난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피치가 끼고 다니던 엄마의 루비반지. 피치가 악마로부터 루비 반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던 중, 대천사 ‘아프로디테’로부터 ‘천사의 보물’인 ‘천사의 거울’을 얻게 된다. 아프로디테는 피치에게 ‘웨딩피치’로 변신하라는 명을 내리고, 평범한 학생이던 피치는 ‘변신소녀’, ‘웨딩피치’가 된다. 애니메이션은 위와 같은 상황을 반복하며, 피치의 친구들인 릴리와 데이지까지 ‘웨딩 천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웨딩천사인 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을 없애려는 악마들을 물리치며 인간세상을 지킨다. 그 과정에서 피치는, 돌아가신 줄 알았던 엄마가 사실 천계를 지키는 천사였으며, 자신이 그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과, 릴리와 데이지, 두 사람도 천사 데이지와 릴리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같은 학교 축구부에서 활약 중인 케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케빈은 악마족의 후예로 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정체를 피치와의 만남을 통해 깨닫게 된다. 각성하여 악마가 된 케빈과,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악마와 대항해야만 하는 피치.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종족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고, 세계를 지키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총 55부작, 한국에서는 외색이 짙거나 선정적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삭제된 편들을 제외하고 총 51편이 방영되었다. mbc에서는 일본판 원곡이 아닌 별도의 곡을 제작하여 주제곡으로 사용하며 눈길을 끌었다. ‘전설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주제곡은 우리가 알던 일반적인 ‘소녀 만화’의 오프닝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카드캡터 체리> , <천사소녀 네티> 등 수많은 소녀 만화들의 오프닝이 상큼하고 발랄한 사랑을 노래하는 쪽이었다면, 웨딩 피치의 주제곡 ‘전설의 사랑’은 강렬한 록 사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린 어깰 기대던 너는 나의 믿음일 뿐야 /  날 지키는 너의 그 사랑을 난 느낄 수 있어’ 와 같은 강렬한 가사도 눈에 띈다. 1999년 sbs에서 재방영 될 때 sbs는 원곡의 타이틀을 번역하여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수많은 이들은 아직도 <웨딩 피치> 하면 그 강렬한 사운드의 전설의 사랑을 먼저 떠올린다. 나또한 그렇다. 그 강렬한 노래가 <웨딩 피치>에 가장 적절한 주제곡이라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변신소녀’라고 하면 어쨌거나 소녀기 때문에 연약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신소녀들은 약하지 않다. 요술봉을 들고 맨몸으로 전쟁터에 뛰어들고, 자신보다 몇 배는 큰 악당에게 덤빈다. 쓰러지기도 하고, 엎드려 울기도 하지만 소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겁먹지도 않는다. 우리가 보았던 수많은 ‘남자 주인공’들 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변신소녀는 악당뿐만 아니라, ‘여자는 연약하고,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편견도 완전히 깨부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변신소녀들이 등장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소녀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남자 주인공’에게 힘을 보태주거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즉 조력자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직접 전쟁터로 나가 싸우는 ‘주인공’이다. 

  웨딩피치는 타 변신소녀 물과 차별화된 점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2단 변신’을 꾀한다는 점이다. 변신소녀들은 으레 평범한 소녀에서 변신소녀로 딱 한 번의 변신만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웨딩 피치는 ‘웨딩피치’ 와 ‘파이터 엔젤’로 총 두 번의 변신을 할 수 있다. ‘웨딩피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부케를 든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전투는 하지 않고 부케 (무기)를 이용하여 적과 싸운다. 여기서 한 번 더 변신을 하면 ‘파이터 엔젤’이 되는데, 짧은 치마와 딱 붙는 티셔츠, 그리고 높은 힐을 신은 모습으로 변한다.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무기 또한 주목할 만 하다. 웨딩피치는 타 변신소녀 물과 달리 천사의 거울, 천사의 립스틱, 천사의 시계 등 여자들이 실제로 자주 사용하는 소품들을 무기로 사용한다. 여자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사용하게 되는 제품들을 무기로 사용한다. 미를 가꾸는 용도로만 사용될 줄 알았던, 여성스러움의 대명사였던 립스틱이 적을 무찌르는 무기가 된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발상인가. 

  웨딩피치의 완구들도 큰 인기를 끌었다. 웨딩피치에 등장하는 각종 코스튭이나, 반지나 목걸이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판매되었는데, 90년대 당시 시가로 4 ~ 5만원대에 거래되었다고 하니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높은 가격에도 불구, 당시에는 정말이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소년들이 로봇을 사 모으는 것처럼, 소녀들도 끊임없이 변신소녀들의 인형과 코스튬을 사 모았다. 로봇이 소년들의 ‘무장’에 대한 욕망을 투영했던 것처럼, ‘변신소녀’들은 소녀들의 욕망을 투영했던 것이다. 나도 강하고 아름다운 ‘변신소녀’가 되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높은 성에 갇혀 나를 구해줄 왕자만 기다리는 공주는 더이상 없다. 악당을 쓰러트리는 당찬 소녀들이 있을 뿐. 소년은 만들어진다. 소녀도 마찬가지다.* 




2015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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