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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니 최 Jun 22. 2022

엄마라는 이름

<마당을 나온 암탉> 리뷰

엄마라는 이름

<마당을 나온 암탉>       

   


  1. 왜 마당을 나온 암탉인가

  ‘마당을 나온 암탉’은 제목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배경이 ‘마당’이다. 마당은 ‘인간’의 전유물로 표현되기 마련이지만 ‘동물들’을 삽입함으로 마당을 재구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동화도 ‘마당’의 주인인 ‘인간’인 주인 부부가 등장하지만, 주인 부부는 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철저히 동물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글들을 몇 번이나 읽어본 적이 있다. 대다수의 글들은 동물을 너무 ‘인간스럽게’ 표현하거나, ‘동물’ 그 자체로 표현하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굳이 동물이 주인공이어야 하나’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후자의 글은 너무도 사실적이라 감정을 이입하거나 공감을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 동화는 두 가지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인 ‘잎싹’은 양계장에서 알을 낳는 양계용 암탉이다. 잎싹이 등장하는 첫 부분에서 양계장 철창 안에 갇힌 닭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수탉 부부가 잠을 청할 때는 횟대에 올라앉는다는 것과, 집오리들이 무리를 지어다닌다는 점, 알을 품을 때 가슴의 털을 뽑아낸다는 점 등등 동물들의 습성에 대해 잘 알고 쓴 관찰력이 높은 글이다. 그렇다고 감정이입이 어렵냐? 그것은 아니다. 동물들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생각이나 고민은 굉장히 ‘인간적인 것’들이다. 동물들이 모성이나, 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동화는 동화적인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고, 애니메이션으로 골라 각색하기에 적절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2. 왜 잎싹일까?

  글을 읽으며 나는 왜 ‘주인공이 잎싹일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 

  잎싹은 양계용 닭으로, 알을 낳기 위해 태어나고 사육된 닭이다. 동물이지만 동물처럼 살 수 없는 것이 잎싹의 운명인 것이다. 잎싹이 등장하는 글의 첫 머리는 사실 충격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양계장과, 양계장 철창 안에 갇힌 닭들의 모습. 알을 낳지 않기 위해서 먹이도 마다하던 잎싹이 낳게 된 피가 맺힌 볼품없는 알. 주인이 그 알을 꺼내어 마당에 던지고, 늙은 개가 그것을 핥아먹는 모습까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어둡기까지 하며, 더 나아가 ‘끔찍하다’ 라는 느낌마저 주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어쨌거나, 아이들이 읽는 글이다. 아이들이 읽는 글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어두운 것을 기피하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는 잎싹 보다 마당에서 사는 수탉 부부의 삶을 보여주는 편이 더 ‘동화’ 같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수탉 부부가 아닌 잎싹을 택했고, 집오리가 아닌 외톨이인 나그네를 택했다. 작가가 그들을 택한 것은 ‘밝고 아름다운 것’만이 아닌 ‘어둡고, 외로운 것’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을 애니메이션으로 가지고 올 때에는 약간의 각색이 필요하다. 끔찍한 장면을 글로 읽고 상상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며, 어쩄거나 주 타겟층은 어린아이들이다. 그래서일까. 인물들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특히, 잎싹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우울함을 넘어, 처절하게 보이기까지 하던 잎싹은 영화에서는 보다 밝고, 긍정적이며, 사교적인 인물로 변모한다. 마당 식구들도 ‘동화’보다, ‘영화’에서 더 잎싹에게 호의적이다. 대표적으로 마당을 지키는 늙은 문지기가 그렇다.

  상황은 어둡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희망적이기도 하다. 고난과 역경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인물들이 점차 성장해가며, ‘타인들보다 낮은 삶’을 살던 그들이, ‘타인들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들이 읽고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독도 이 글을 골라 각색을 하였을 것이다. 주인공이 ‘수탉 부부’가 아닌 ‘잎싹’이기에 말이다.     



 3. 엄마는 강하다아니 는 강하다

  사냥꾼 족제비가 등장한다. 족제비가 사냥을 멈추지 않으며, 글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족제비 때문에 죽어나간 인물들은 많다. 뽀얀 오리도 있고, 나그네도 있고, 암탉이 나은 새끼들도 몇 마리나 물려가 죽었다. 인물들은 그래서 모두 족제비를 두려워하고, 그를 비난한다. 하지만 족제비에게도 족제비만의 사정이 있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자식을 기르기 위해서 계속 사냥을 했던 것이다. 임신을 한 상태에서, 잎싹에게 눈알을 쪼여 애꾸가 된 뒤에도 눈 오는 벌판을 뛰어다닌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잎싹이 족제비를 만날 때마다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도 자신의 자식, 초록머리 때문이다. 초록머리가 없었다면 잎싹은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싸우지 않았을 것이며, 오래 살지도 못했으리라고 추측한다. 결국 ‘엄마’들의 싸움인 것이다. 각자 다른 모습으로 자식을 지키려는 ‘엄마들의 싸움.’ 

  하지만 잎싹의 투쟁을 글보다 영화가 더욱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도, 글과 같은 감동은 없다. 이는 잎싹의 내면을 영화가 글보다 더 섬세하게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실제로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잎싹이 마당을 나오는 이유가 ‘모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영화를 볼 때에는 ‘모성’보다는 ‘자유’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잎싹의 내면을 ‘나레이션’과 같은 장치로 다루었더라면 글과 같은 깊은 여운을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4. 마무리

  흔히들 ‘원작이 있는 영화’라고 하면, 얼마나 원작을 철저히 재현하였나에 비중을 두기 마련인데, 글과 영화는 엄연히 다른 매체이다. 재현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각 장르의 특성에 맞게 각색이 필요하고 재구성을 해야 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감독이 그 차이를 이해하고, 원작을 재해석하려고 하였다. 이런 작은 노력들이 모여, 언젠가는 ‘제대로 된’ 국산 애니메이션이 탄생될 것이라 생각한다. *     





* 2015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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