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엔 그렇고 그렇다고 쌓아두기엔 답답한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고 딱히 해결책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이라는 것. 쉽게 말할 수 있고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은 고민이 아닐 게다. 하지만 계속 쌓아 놓고 있다간 병이 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털어놓을 수도 없다. 그것도 가까운 사람한테는 더더욱 말이다. 고민은 털어놓을 때 두려운 것은 아마도 나의 고민이 과연 그 사람 귀에만 들어갈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반대로 누군가가 내 귓속에 털어놓은 고민을 나는 과연 끝까지 입을 다물수가 있을까?
시간과 비밀을 공유하는 게 친구라면 우리 인생에서 진정한 친구는 몇이나 있을까? 오히려 가까운 관계에게 털어놓지 못하니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거나, 처음 만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과거를 털어놓은 일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해결도 안 되고 털어놓을 사람도 없다면, 만약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없애는 방법이 있으면 어떨까? 바로 이 의문에서 소설 '너의 이야기를 먹어줄게'는 시작한다.
'화괴' 이른바 사람의 이야기 정확히 말하면 기억을 먹는 괴물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잊고 싶은 기억과 트라우마 상처를 마땅히 맡기게 되지 않을까? 세상을 살기 힘들고 갈수록 퍽퍽하다고 하던데, 학업 진로 연애 취업 등등.. 해결되지 않을 거 같은 그것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면 차라리 술에 취해 하루를 보내듯이 영원히 기억을 마취시켜주는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민은 문제 로터 오고 그 문제는 기억에 있으니까,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매일매일 리셋된 하루하루를 살지 않을까? 매일 오늘을 살라는 성현들의 가르침을 실행할 수 있는 그런 판타지가 있다면 말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 세월이(주인공)와 혜성(기억을 먹는 괴물)은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상담 동아리를 만든다. 이른바 고민을 해결해주다가 안되면 고민을 지워버리는 그런 무시무시한 동아리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차라리 지워달라는 김해원과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고백을 해야 하는지 좋아하는 마음을 차라리 지워야 하는지 고민하는 유해람, 그리고 자살시도의 목격의 트라우마를 지워달라는 권다경까지 10대의 터널을 지나는 학생에게 누구나 겪을 만한 진로와 사랑 연애 그리고 상처와 트라우마 문제까지 그들의 안고 있는 상처와 고민을 들어주면서 그들을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는다.
바로 기억을 지우면 문제가 해결될까?
사람의 이야기는 혼자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기억의 또 다른 주인들이 있는데 다른 인물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나만 편하자고 기억을 삭제하는 게 맞을까? 나의 기억의 주인은 온전히 나에게 있을까?
의도치 않았던 딜레마에 봉착한다.
딜레마
1. 힘든 기억은 지워버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랬다간 다른 부작용이 생길까?
2. 사람의 일을 초자연적인 존재 "괴물"의 힘으로 해결하는 게 맞을까?
3. 기억의 주인은 나 혼자일까? 다른 등장인물의 동의도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던 딜레마가 벌어지고 만다. 가족들의 반대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던 김해원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웠지만 다시 상담하러 찾아와서, 또다시 꿈과 현실 사이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또한 자살 시도를 목격한 권다경의 또 다른 기억의 주인공 바로 자살을 시도했던 새별이가 찾아와서 또 다른 문제가 봉착한다. 자살시도자와 목격자 누구의 상처가 더 클까? 그것을 자로 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지울 권리가 과연 그들에게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깨닫는다. 이야기는 결코 한 명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고,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줘야만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코 기억을 지워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말이다. 반쪽을 잃은 이야기는 절대 제 구실을 할 수 없으니까.
또한 힘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은 어떨까? 소설 중 해원이는 짝남에게 차일걸 알면서도 고백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을 본인이 물론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 상대도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으니깐 말이다. 수치심과 속을 태우는 감점을 누르고 산다면 그것 또한 괴롭지 않을까? 고백하고 차이고, 그 차인 기억을 지운다면 아무 일 없이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부분은 공감이 많이 간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반드시 좋아할 의무는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나의 허락을 맡지도 않는다. 그리고 감정은 충분히 이성을 누르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화약 같은 것이기에..
비단 연애 문제뿐 아니라 사고나 트라우마 폭력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다면 오히려 더 나은 내일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애꿎은 죄책감 때문에 봄의 햇살과 가을의 단풍을 만끽할 수 없는 과거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고 가지고 있어 봤자 마음만 아프게만 하는 그런 과거를 지울 수만 있다면야. 그깟 괴물이 대수고, 돈이 문제 일리가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본인이 했던 옳다고 생각해서 행동으로 옮겼던 기억을 지우는 일이 어쩌면 아닐 수가 있다고 깨닫는다. 이 부분이 작가님의 통찰이 돋보인다. 현재의 괴로움과 고통 때문에 통으로 기억을 들어낸다면, 미래의 '나'가 후회하지 않을까?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때의 최선이 나중에는 최선이 아니니까 말이다. 인간사는 복잡하고, 상황은 언제든지 변하니까 말이다. 그걸 깨달았는지 화괴(김해성은) 어느 순간 사람들을 기억을 먹는 것을 주저한다.
기억을 지우는 대신 해결도 할 수 없는 문제를 누구보다 귀담아들으려 노력한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상담하러 온 학생에 공감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세월이는 누군가의 깊은 이야기를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많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중에서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세월이는 이제 그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느낀다. "나 힘들어" 말에 해원이의 부모처럼 "갈비 먹으러 갈래?"가 아니라 서툴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마치 내 몸처럼 귀담아듣는다. 그리고 진지한 조언을 건넨다. 결국 고민이라는 것은 당사자 제일 잘 알고 있는 것도 그리고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는 것도 결국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작가는 이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고민이 있는데, 그 기억을 지워버린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점. 하루 종일 청소해도 금세 더러워지는 교실처럼, 오늘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이 내일의 문제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기억을 지워가는 DELITE 버튼을 누리고, 휴지통에 넣은 다면, 인생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남아있을까?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감당하기는 싫지만 함께 느꼈던 즐거움 기다릴 때 애틋함. 헤어지고 나서 그리움. 같이 별을 바라볼 때 느끼는 황홀함. 바람이 기분 좋게 불면 찾아오는 행복감까지는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태어나서 죽는 순간 수많은 고통과 슬픔을 감내해야 한다. 슬픔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것도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피할 수 없고 마주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소설의 두 주인공에서 엿볼 수 있다. 극 중 주인공 이름이 왜 세월이겠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일이 있다. 사랑을 할 땐 사랑이 흔해만 보이고, 곁에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가 좋았다로 느끼는 순간도 많으니깐 말이다. 어차피 잠이 오지 않는 고민은 해결되지 않는다. 대신 다가올 슬픔에 미리 눈물 흘리지 말고, 가슴 아팠던 상처와 과거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다면 그다지 아프지만은 않은 그런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고민이 누군가에게 보잘것없는 하찮은 것이지만 내 이야기처럼 들어줄 사람이 있는지? 혹은 나도 그렇게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인지 작가는 물어보고 있다.
혜성이가 세월이의 기억을 지우고 떠나 다시 나타나 마치 처음처럼 만남이 시작되는 것처럼, 어쩌면 고민과 문제는 시간이 흐른 뒤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치료받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내 과거를 전부 털어놓을 대상으로 세월을 택했다. 내가 느끼고 있는 죄책감을 완벽하게 해부해 내게 설명해 줄 것 같았다. 그것을 마주하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정체가 드러난 죄책감은 이제 예전만큼 괴롭지 않을 것이다" -241page"
아... 나도
누굴 기다리는 줄 모르는 채 언젠가 내게 올 너를 기다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