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없었던 일주일 -서평-

-용기 없는 일주일 서평-

by 제이티

용기 없는 일주일이라.. 단순히 비겁했고 두려웠던 일주일이 뜻하는 것이었을까? 여기에서 용기는 '박용기'라는 사람 이름이었고 말 그대로 '용기'가 없었던 일주일에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름에 걸맞지 않은 용기는 누가 봐도 약한 아이 꼭 어디에나 못 끼는 그런 아이였다. 먹이사슬 아래층에 있는 그는 자연스럽게 빵셔틀이 되고 급하게 빵을 배달하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만다. 단순 교통사고인 줄 알았지만 이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었다. 왕따로 인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담임선생님은 자수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집단상담으로 넘어간다는 엄포를 놓는다. 아이들은 누구나 짐작 가능한 2명의 인물 허치승과 오재열은 미루어 짐작했지만, 도무지 제3의 인물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자수하지 않으면 연대책임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범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3의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깐. 용기가 배달한 빵을 안 먹은 사람은 없었고, 유머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키도 작도 목소리도 앵앵거리는 용기를 누구도 친구로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깐. 그런 아이는 왕따를 하라고 왜인지 정해준 것 같은 아이였으니깐 말이다.


왕따.. 10년 넘게 교직 생활하면서 수없이 보았고 앞으로 없어질 거 같지 않은 그런 묘한 단어이다. "학교폭력 멈춰"라는 말은 의미는 있지만 공허한 외침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섣불리 해결하지도 그렇다고 넘어가기도 어려운 그런 단어. 가족보다 친구가 더 중요한 나이이기에 왕따를 당하는 학생에게 "너라면 무리 속에 있지 않아도 잘할 수 있을 거야. 혼자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영원한 관계는 없어."라고 이야기해봤자 위로는커녕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된다. 해결할 수도 그렇다고 방관할 수도 없는 묘한.. 박용기처럼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절대로 수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영원히 계속되는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그 교묘한 따돌림과 은근한 서열관계.. 이 책은 뻔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보통 피해자 입장에서 억울한 일을 서술하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여기서는 '가해자'에 초점을 맞춘다. 왜 대체 무슨 이유를 박용기를 괴롭혔는지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용기는 그렇게 잘못을 하지 않았다. 같이 사귀기에는 부족해 보일지언정 그렇다고 같이 미워하기엔 정당한 이유는 없는 아이 었다. 아이들 말대로 그냥 남들이 하니까 휩쓸려서 한 발씩 얹은 거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 한 발이 반전체가 되었을 때 용기를 짓누루는 무게는 그들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할 수는 있다. 나 역시도 수많은 오해와 불화를 겪었고,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남을 싫어해 본 적이 있으니깐 말이다. 그것 또한 '자유' 이기에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마저도 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종교적으로 따지면 죄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미워하는 생각이 직접 손과 발로 옮겨지는 결정적인 동인은 무엇일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강력한 '명분'이 있어야 될 거 아닌가?


애석하게도 명분은 그저 '남이 하니까'다. 실제 용기를 괴롭힌 아이는 허치슨과 오재열 밖에 없다. 나머지 반 아이들은 그저 동조했을 뿐이다. 오재열이 박용기에게 헤드락을 걸 때 깔깔대며 웃었던 아이들은 그것을 진짜 장난이라고 생각했을까? 만약 거기서 정색을 하고 박용기가 '싫어'라고 말했으면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더 크게 웃었을 것이다. 그것 또한 가벼운 장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난과 폭력의 기준은 애매하다. 카메라로 찍어서 감시한다고 해도, 한 면만 비추는 렌즈는 속 마음을 비추는 내시경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게 장난을 가장한 폭력이 이어지고, 친구들을 위해 선한 기부(?)를 하는 박용기의 선행은 지속된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마음은 컵라면이 익는 동안만 들었고 허기진 배에 면발을 집어넣기 시작하면 금세 사라지고 만다. 다른 날의 삼 분 동안은 짧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낄낄대는 아이들의 말소리에 사라졌고 또 그 뒤의 삼 분에는 아예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


죄는 여러 번의 익숙함을 겪으면 뻔뻔함이라는 것을 낳게 하나 보다. 용기가 사다 준 탄산음료가 목으로 넘어가는 건 남의 고통보다 나의 갈증이 더 중요하기 때문인가? 누구나 자기 손톱의 가시가 아픈 법이다. 하나 심장을 도려낸 사람 앞에서 내 고통이 더 아프다고 말할 순 없다. 피자 배달을 시켰는데 빨리 안 온다고 닦달하다 배달 오토바이 운전자는 신호를 무시하다 사고를 당한다. 그럼에도 식어버린 피자가 중요할까? 놀랍게도 지어낸 말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라 더 소름이 끼친다. 더 소름인 건 "내가 오토바이 저럴 줄 알았다. 사고 난 다른 차 운전자는 어떡하냐"라는 댓글에 몇 백개의 좋아요가 달린다는 것이다. 아마 이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어떻게 세상은 돌아가는 것일까? 인터넷 세상과 실제 세상은 다른 것이기에 돌아가는 것일까? 메타버스와 현실이 다른 것처럼..?


이름만 달라질 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학교, 직장, 군대 , 인터넷 등 어느 곳에서 나타난다. 이른바 혐오의 감정은 복잡한 세상사를 단순하고 선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타당한 근거보다 중요한 건 나랑 생각을 똑같은 이른바 '아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혐, 남혐, 성 정체성, 진보냐 보수냐로 갈라진 댓글창을 보면 조지 오웰이 그랬듯 인간에 대한 회의가 느껴진다. 인문학 강의를 나간 적이 있는데 맥락 없는 수업 내용도 아무 관계가 없는 질문이 쏟아진다. "당신은 1번을 뽑았습니까? 2번을 뽑았습니까?" 화가 나서 난 허경영을 뽑았소라고 답했다.


그렇다 이게 우리나라 어른들의 수준인 것이다. 그러니 "학교폭력 멈춰" "왕따는 안 좋은 거예요."라고 학생들에게 말할 자신이 없다. 학교보다 더 정글 같은 SNS에 노출되는 현실에서 너희들만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미 학교는 네모난 직사각형의 교실이 아니다. 누가 봐도 삼각형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 돈 있는 아이 유머러스한 아이 주먹이 센 아이 운동을 잘하는 아이. 그 조건 중 여러 가지를 갖춘 아이들이 피라미드 꼭대기를 차지한다. 신라의 골품제와 인도의 카스트와 조금 다른 점은 얼마든지 계층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꼭대기에 있었던 아이가 맨 밑으로 내려올 수 도 있고, 다시 누군가 올라갈 수 도 있는 어쩌면 어른들의 계급보다 학교의 삼각형이 더 기회의 면에서는 공정한 것일지도...


여기서 왕따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아이들이 진짜 박용기를 방관하는 이유를 말이다.


”엄마 우리 학교에 아무도 상대하지 않은 심각한 왕따가 있는데 나라도 그 애의 친구가 되어줄까?

아이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지요.


얘 관둬 그러다 너까지 왕따 당할라. “


그날 밤 남자아이는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고 해요. 네 그 아이가 바로 왕따의 주인공이었던 거예요. -230-


작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박용기가 있었기에 어쩌면 반 아이들은 든든할 수 있었겠다. 적어도 1년은 말이다.

1명의 희생이 99명의 피해보다 나으니깐 말이다.


예수는 99마리의 양을 내버려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지만, 우리는 예수가 아니니깐 말이다.

각자도생과 경쟁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낙오자는 그저 내 뒤에 있는 낙오가 된 어떤 것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내 앞에 있는 경쟁자다. 책 속의 정혜연처럼 말이다. 친구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일 사회 시험이 더 중요하니깐....


경쟁과 친구는 같이 갈 수 없는 단어일 수도.. 마침 오늘이 수능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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