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과 결과 무엇이 중요할까?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다양한 선생님이 계셨지만 학교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른바 호랑이 선생님 혹은 미친개, 학주 등 듣기만 지금도 눈이 저절로 감기는 어마어마한 선생들이 계셨다. 뭐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혈액순환용으로 매일 3~4대씩은 아무 이유 없이 맞는 게 당연했고, 누구든 문제를 삼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때처럼 혈액순환용 동기유발을 했다간, 뉴스에 나오는 교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때 배운건 다 까먹었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있다. 바로 국어 “수사법”이다. 직유법, 은유법, 활유법, 의인법 등등 약 30가지의 수사법이 적힌 프린트물 한 장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기억이 난다. 덕분에 국어 공부할 때 이와 관련된 문제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왜 다른 모든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이 것만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을까? 그때 선생님이 재미있게 잘 가르쳐 주었기 때문일까?
그 비결은 담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위플래쉬”라는 영화인데, 번역하면 채찍질이다. 그렇다. 진짜 내가 말인지 사람인지 모르게 많이 맞았다. 그것도 매일 다양하고 다채롭고, 신기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그중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3센티"라는 것인데, 말 그대로 책을 읽을 때 3센티 거리를 두고 읽어야 한다는 룰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면, 그 자리에서 뺨이든 뒤통수 든 골고루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맞았던 것 같다 영화 속 플래쳐 교수가 하는 욕하고, 소리 지르고, 의자를 던지고, 웃었다가 다시 있는 힘껏 핏줄이 터지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마치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너무도 생생했다.
심지어 내가 내가 반 1등이었는데, 반장이어서 맞고, 애들이 떠들어도 내가 맞고, 옆에 애가 틀려도 내가 맞고, 반 성적이 떨어져도 내가 맞았다. 그때는 나는 너무도 작았고, 선생님은 그렇게 커 보였다. 반에서 오직 책 넘기는 소리만 허용되었다. 아이들은 미친 듯이 3센티 간격으로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하위권 상위권 학생 모두 할 것 없이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기말고사 목표 점수를 쓴 다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1점당 한 대씩 맞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상위권이나 하위권 학생 모두에게 공정했다. 오히려 상위권 학생들이 불리할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 반은 언제나 1 등반을 놓친 적이 없었고, 그 선생님은 학교에서 우수교사라 학부모, 교장선생님, 동료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았다.
영화 내용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나의 학창 시절 특히 중학교 시절을 압축해놓은 듯한 시나리오가 펼쳐졌기 때문에, 나는 단순히 예술영화로 생각하면서 보기 힘들었다. 네이먼이 점점 수줍은 소년에서 독기와 광기 가득한 야수로 변할 때 그의 눈빛이 예전의 내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네이먼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천재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플래처의 교육 방식은 문제가 없는가? 당근과 채찍, 모욕과 칭찬, 가학적인 방법이지만 어쨌든 최선의 결과를 끌어낸다. 우리에게 다소 익숙한 문장이긴 하다.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신념을 얘기한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고 해로운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야”
세상은 1등만 기억하고, 2등은 기억하지 못한다. 손흥민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 기사로 접해 마치 옆에 사는 주민처럼 느껴지지만, 그 외의 축구 선수는 알지 못한다. 로또 1등은 20억인데 2등은 5천만 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등은 수 억의 상금을 타지만, 2등은 얼마를 탈까? 심지어 한우 투 뿔과 원 뿔도 차이가 어마 어마하다. 왜 그토록 원 탑이 돼야 하는지 굳이 더 예를 들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 가는 대사이긴 하다. 저 대사는 아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회, 숫자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긴, 배달 어플에서 치킨을 하나 시켜먹어도, 별 점과 리뷰를 보고 제일 상단에 링크돼 있는 것을 주문하지 않았던가? 이게 플래처 교수를 비판하면서도 마냥 욕을 할 수는 없는 이유 이긴 하다.
그런데 플래처 교수의 철학이 네이먼한테 그대로 흡수된다는 점이다. 가족 식사할 때 네이먼은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착한 아이가 아닌 모습으로 대들기 시작한다.
“찰리 파커도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조 존스가 머리에 심벌즈를 던지기 전까지는요”
“그게 네가 말하는 성공이라는 거냐?”
“34살에 돈 없고 마약에 찌들어서 죽는 건, 내 기준에서는 성공이 아니다.”
“34살까지 살고 오래 기억되는 게 훨씬 낫죠.”
어느새 플래처는 그토록 자신을 무시하고 욕하는 교수를 닮아 가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가족의 저녁 식사보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연인과 영화 데이트보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해주고 열광하는 기억하는 무대 위의 최고가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시끌벅적하게 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선생님 김주영과 제자 예서가 떠오른다. 서울대 의대 진학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블랙 슈트가 잘 어울리는 선생님.
그녀도 역시 플래처 교수랑 비슷한 대사를 남긴다.
“ 서울대 의대 입학을 방해하는 모든 존재를 치워라. 그게 엄마라도”
플래처와 김주영 모두 자신의 제자들을 최고로 키워 냈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제자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그만큼 성공으로 가기 위한 길은 좁아서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게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친구라도?
과정과 결과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가? 독자마다 관점도 다르고, 상황에 따라서 답이 달라질 수 도 있다. 물론 이상적인 답은 과정과 결과 모두가 바람직하면 좋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가 않다. 나쁜 과정과 방법이 좋은 결과를 미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많은 부작용이 있지만 그래도 결과가 안 좋으면, 그동안의 노력은 모두 헛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뻔한 질문에 다른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포인트는 왜 네이먼은 플래처를 닮아가고, 플래처는 왜 네이먼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예서와 김주영도 왜 서로가 깊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
다시 나의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보자, 중학교 때 배 00 교사는 나에게 있어서 어떤 선생님이었나?
좋은 선생님인가? 최악의 선생님인가? 솔직히 한 가지의 답을 선택할 수가 없다. 그의 기괴하고도 비정상적인 자극적인 방법은 나에게 꿈을 향해 달려가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무시하고, 비교하고, 모욕적인 발언은 나에게 “독기”를 주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나는 왜 인지 지고 싶지가 않았고, "네 까짓게”라는 단어는 상처보다는 틀린 말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나중에는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네이먼은 마지막에 그동안 갈고닦은 자신의 드럼 실력을 그가 그토록 원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환호를 받는다. 심지어 자신을 머저리라고 욕했던 플래처 교수한테도 인정을 받으며, 영화는 그렇게 감동의 7분을 선사하면서 막이 내린다.
얼음물에 피를 쏟으며 최선을 다하는 열정. 타고난 것을 넘어서는 울부짖는 몸부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집이 금수 저면 그런 독기는 나오지 않는다. 극 중 플래처에게 못 버틴 드러머는 전공을 바꾸고 의대에 진학한다. 에어백이 있는 차는 사고가 나도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에어백이 없는 차는 운전을 매우 조심히 잘해야 한다.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소심한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네이먼은 자기가 결코 대단한 사람이라고 본인도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도 그의 꿈과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으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플래처 교수라서 빠져 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무 자르듯이 선택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이후 네이먼이 어떻게 살아 가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인가? 찰리 파커처럼 성공한 후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 과연 그의 가족과 연인 친구들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서 그를 기다려 주고 있었을까? 아니면 무대에 내려온 후 홀로 쓸쓸히 저녁을 먹고 있지 않을까? 아마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음식은 함께 먹어야 맛있지 비싸다고 맛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플래처와 김주영 모두 극 중 혼자로 나온다. 각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정작 같이 밥 먹을 사람 한 명 없다. 검은색 명품 슈트와 올백 머리가 무색하게 어디 외식 한 번 갈 데가 없다. 편하게 커피 한잔하면서, 소소한 일상을 공유할 친구 한 명이 없다. 네이먼도 그런 삶을 살지 않을까?
그래도 네이먼은 드럼이 있기 때문에 행복할까?
가수 아이유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자신이 음악을 좋아해서 가수가 되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큰 성공도 이루었지만, 그토록 좋아하던 음악을 10년 동안 편하게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제 그녀에게 음악은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즐기지 못한다고 한다.
내 삶과 같아서 나는 네이먼에게 깊게 호감이 간다.
그가 행복한 답을 찾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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