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짜와 가짜 사이

by 제이티

진짜와 가짜 사이

2022/10/3


홍지호

사람들은 확증편향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데로 믿고 자신이 보고 싶은데로 보는 것이 바로 확증편향이다. 심지어 예수 또한 자신의 12제자들을 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 또한 확증편향에 빠져있었다는 나의 생각이다. 전설적 성인도 빠져있던 확증편향에 나 같은 사람이 피해 갈 방법이 없었다. 진짜 나와 가짜 나 중 무엇이 진짜 나인지 안다는 확증편향에 빠진 것처럼 말이다.


9월 29일은 내 초등학생 인생 중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내일은 코로나 때문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2년 반 동안 그 흔하다는 에버랜드도 못 간 상황에 내일 에버랜드를 간다니 검은 생각들이 나를 덮쳤다. 바이킹을 타다 날아가면 어떡하지, 티익스프레스를 타다가 안전벨트의 문제 때문에 추락하지 않을까? 같은 망상에 빠져있는데 간과했던 사실이 있었다. 나는 민결, 찬민, 진태, 원찬, 건태 이렇게 6명이서 조를 다 짜놯지만 반에 한 명이라도 소외되면 조를 선생님이 직접 정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 조는 데려가겠지 하며 에버랜드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늘 항상 어떤 드라마 영화 소설 모두 위기가 있기 마련이고 나의 스토리에서도 어김없이 있었다.


소외된 아이들이 각반에 한 명씩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랜덤으로 조를 짜기 시작했다. 나는 아까 조를 짠 찬민, 건태와 같은 조가 되어 한없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반에 아무도 같이 에버랜드에 같이 가고 싶지 않은 범석이라는 애를 아무도 같이 가려하지 않자 선생님이 스산한 분위기로 말을 시작했다. 그 말 중 한마디가 나의 또 다른 내가 분열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반년을 산 줄 이제야 알았다. "양보도 없이 너희에게 정말 실망이다." 이때 나는 성수를 맞은 악마처럼 속 안이 타들어갔다. 나는 꽤나 악마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무엇을 잘 못할 때 그것에 맞는 당위성과 정당함을 제시하곤 한다. 독일의 히틀러도 유대인들을 부정적 존재로 만들고 학살하면서 노벨 평화상 후보까지 올랐던 것을 보며 나를 겹쳐 본다. 3년 만에 가는 현장체험학습인데 친한 애들이랑 가게 해달라는 정당함을 부여하곤 나는 끝 끝내 소외된 아이들과 에버랜드를 가지 않았다.

나는 착한 척 정의로운 척 다 했으면서 정작 왕따 당하는 애 하나랑 같이 다니는 것도 꺼려했다. 그런데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라는 말 모두가 한 번씩은 듣는 말이지만 이 지구에는 이 말은 모순덩어리일 뿐이다. 우리 반만 해도 한 조가 같이 간다고 했다가 결국에는 친구들이 꺼려하는 애들끼리 조를 짠 것만 봐도 빛 밑에 질 그림자는 있어도 빛은 더 이상 빛나지 않고 어둠만이 빛을 가릴 뿐이었다. 나의 모습이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확증편향에 빠진 나였지만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 듯 나의 가상의 강에 현실이 헤엄치자 나의 가상이자 망상은 서서히 자존감에서 자괴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늘 범석이 같은 애들과 체스도 하고 게임도 해야지 하며 비몽사몽 졸린 눈을 가다듬고 띠리로 리 하는 현관문을 뒤로하며 다짐한다. 그럼에도 내가 범석이와 대화하는 순간은 전교 회장으로써 여자 줄이 아닌 남자 줄에 서라는 경고뿐이다. 이런 내가 어떨 땐 밉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거울이라는 기능을 만든 것은 아마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굳이 6900원짜리 당당 치킨을 외면하고 곳 있으면 3만 원이 될 교촌 허니콤보를 요기요를 켜서 시키는 이유도 인간의 이중성에 있을 것이다. 6900원에 맛있는 당당 치킨보다 3만 원짜리 교촌 허니콤보가 더 맛있기에, 행복하기에 싼 게 최고라던 우리 아버지도 교촌치킨에 벌떡 일어나 밀린 이불은 눈에 1초도 두지 않고 거실 식탁에 앉아 비닐봉지를 풀어재낄 뿐이었다. 나는 인간의 이중성은 행복과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다 나온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착하긴 해야겠고 그렇다고 나의 행복을 헤치기는 싫은 이기적이고 영리한 인간의 선택인 것이다. 라며 나는 또 나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든다.


나는 이제 어디까지가 진짜 나이고 어디까지가 가짜 나인지도 헷갈린다. 글을 쓸 때만큼은 진짜 나로 쓰는지 알았는데 진짜와 가짜의 차이마저 흐릿해진다. 마치 빨간색과 파란색이 점차 보라색이 돼가듯 점점 진짜와 가짜는 또 다른 내가 되어 간다. 맨날 처음 보는 사람이나 어른에게만 공손하게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수고하세요 하고 이제는 애들에게까지 인사말이 야! 가 아니라 안녕? 이 되어간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럼에도 부정은 하지만 하나가 되어간다. 이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나의 중학생이 되기 전 2달 동안의 과제인 것 같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법 – 최소한의 선의